모두가 진지하다
대표는 봄쌀 씨가 하는 게 좋겠어요.
첫 출근날 '훈'이 내게 말했다(물론, 봄쌀 대신 내 이름으로 말했다). 1초의 고민도 없이 "그러죠 뭐."라고 답했다. 그리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 직함을 달아야 했다. 명함을 이사로 팔지, 팀장으로 팔지 지분을 나눠가진 우리끼리 정하면 되는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소꿉놀이 할 때 "너가 아빠해. 내가 엄마할게." 딱 그 수준.
물론 언질이 있긴 했다. 실제 스타트업이 스타트가 되면 내가 대표를 할 수도 있다고. '훈'은 아주 무거운 왕관과 꼬인 어깨띠를 다음 미스코리아에게 넘겨주는 듯한 처연함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그때 역시 '그런가보다' 싶었다. 흔한 스타트업에서 '소피아' '줄리아' '브레드' 영어이름 부를 때처럼 내게 붙은 이름이 '대표'라고 여겼다.
덧붙여 '훈'은 내게 CEO로서 리스크 관리도 신경 써야 한다며 음주운전 같은 거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 하였다(우씨, 나를 뭘로 보고). 내가 음주가무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대리운전 기사님들을 더 사랑하는데 말이다.
"걱정마세요. 나 한 잔만 먹어도 대리 꼭 불러서 가니까. 므하하하 불륜 같은 것도 조심해야겠네."
이런 순간에도 개그욕심이 났다.
나의 일은 어차피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어서 잘나가던(믿어줘~) 출판사 팀장 자리를 박차고 나온 거다. 그 일을 하기 위해([그 일]은 아마 브런치 일기 15회쯤 나오려나?), 우리의 스타트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직함 is 뭔들 괜찮았다. 내가 대표든, 이사든, 팀장이든!
그런데, 역시나 나는 아주 심플한 문제 한 가지를 간과했더랬지.
대표로서 해야 할 일까지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둘째날부터 모든 구성원들은 내게 '대표'라고 불렀고, '대표로서의 생각'을 물었다. 대표 소리 듣는 건 문제 없었으나 내 생각을 말해야 하는 순간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버퍼링이 걸렸다.
그동안 출판사 팀장으로서 매우 결단력 있게 의사결정을 하고, 아닌 것 같을 때는 "이건 아니야!"라며 위든 아래든 상관없이 들이박곤 했다. 막상 대표가 되자 힘들었다.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 모르겠어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거나, 그때 맞고 지금은 틀리면 어쩌지, 매순간 겁이 났다. 시승도 안 해보고 그 자리에서 차를 살 정도로 추진력+결단력 끝판왕이던 내가!
며칠이었지만 자신감을 잃어갔다. 눈치를 보게 되었다(진짜다!). 개발회의 때 역시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버릴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자꾸 생각을 묻는데, 진짜 '생각'이란 것이 없는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압도했다. 내가 지금껏 모셨던 대표들도 모두 대표스럽지 않았는데, 그중의 제일은 나였다. (하... 나 못할 것 같아;)
대표님, 저는 대표님이 가진 그 생각들이 참 좋아요.
대표님은 진짜 멋진 분인 것 같아요.
어느날의 오후 심란한 표정의 나에게 '심'이 말했다.
그는 진심이란 말도 덧붙였다.
'어... 나?'
그러고보니 '심'은 언제나 내가 전달한 메일이나 자료에 대해 대단하다고 말해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긴 글을 쓸 수가 있나요? 정말 대단해요."
"엉망이던 텍스트를 어떻게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나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보기 좋게 자료를 뚝딱 만들어주셨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자꾸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스멀스멀 이런 생각이 피어올랐다.
'나 좀 대단한 사람인가?'
그 무렵 '훈'도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바지대표처럼 앉혀놓은 게 아니에요. 우리 중에서 고객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에 맞춰 잘 이끌어갈 사람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대표로 추대한 거예요."
함께 미팅을 가는 꽉 막힌 강변북로 차 안에서 '고'가, 손톱달이 뜬 노을진 옥상에서 '승'이, 미팅 다녀올 때마다 간식거리 사들고 오는 '심'이, 밥을 먹다 말고 '훈'이, 나에게 "우리 대표님!"이라 든든하게 말해줄 때마다 동전을 먹고 있는 슈퍼마리오가 된 기분이다.
나 정말 이들과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더디지만 차곡차곡, 대표로서 성장해나갈까 한다. 내 속도로. 우리 멤버들의 동전을 먹으며.
+ 과거세탁
CEO 리스크 관리를 위해 과거세탁을 좀 해볼까 싶어 블로그에 가보았다. 혹시나 블로그에 욕을 지껄이진 않았는지... "없다!" 글이 모두 주옥 같을 뿐. 예전에 나는 글을 참 잘 썼구나 깨닫고 왔다. 역시 행복과 글빨은 반비례한다. 싱글이고 외로울 때는 글이 줄줄 나오더니, 요즘의 내 글빨은 예전같지 않다.
또 다른 과거세탁을 위해 페이스북에 가보았다. 와~ 일밖에 안 했어. 헛소리 일절 없이 오로지 출판사 이벤트 공유만 한 흔적. 심각하게 지난 이벤트는 조금 삭제.
또 다른 과거세탁을 위해 트위터에 가봤더니, 그때도 안 맞았지만 지금도 안 맞음. 드립력이 없어 난.
결혼 전 엑스 남친들의 기억들도 세탁해주고 싶은데, 와... 여기서 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