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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쌀 Jan 09. 2020

이 산이 아닌가벼

내 영혼의 산사태


출판사 에디터로 일할 때 가장 잘한 일 두 가지를 꼽으라면 하나가 이대 평생교육원에서 북에디터 전문교육과정을 진행한(무려 3년간) 일이요, 나머지 하나는 <출판사 에디터가 알려주는 책쓰기 기술> 책을 집필한(2018년 8월 출간) 일이다.


책 쓰고 싶은 분들 이 책 필독서입니다


 

내말이 그말이에요


이 책 안에 있는 모든 내용들이 뼈가 되고, 살이 되겠지만(겸손, 그것은 먹는 거예요?) 무엇보다 '뼈가 되되 뼈대가 휘지 않도록, 살이 되되 비만해지지 않도록' 내가 책 속에서 강조하는 포인트가 있다. 바로 산을 떠올리며 나무를 채워넣으란 것이다. 

초보 저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처음 그리는 나무 한 그루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것만 붙잡고 있는 일이다(프롤로그만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는 분들 뜨끔하시죠?). 그 다음 많이 하는 실수가 내가 좋아하는 나무만 모아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산 하나를 다 채우고 났더니 흔한 계절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책에서 나는 '어떤 산'을 그릴지 뚜렷한 '목표'를 세우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한 그루씩 따로 노는 일이 없다고. 그래야 아름다운 산이 완성된다고. '내가 지금 그려야 하는 건 겨울 산'을 되뇌고 있어야 초록나무로 산 전체를 채우는 일은 없다고.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 책 보셨어요?



이제 스타트업으로 돌아와보자. 


"이런 느낌의 앱은 없었어!" 같은 느낌의 앱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앱이 지금까지 왜 없었는지 따지고 볼 이성이 내게는 없었다. UX와 UI 따위는 애초에 지식이 없으니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오로지 감성적인 접근. '이런 느낌', '이런 분위기' 같은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따뜻한 분위기

규격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느낌

하나하나 손으로 만든 것 같은 수제 스타일(이건 뭐지..)

...


그렇게 산을 채우기 시작했다. 중간에 '이건 좀 아닌가?' 생각하긴 했지만, 내가 밀어부친 사안이었다. 그 책임도 사실상 나에게 있었다. "저기로 갑시다!" 원정대를 끌고서 산 입구까지 데려간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기에. 그런데 다 오르고 보니, 


이 산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직관적이지 않고 산만했으며, 가독성이 떨어졌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눈에 스치는 그림도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아니 옆에 저렇게 오르기 쉽고 등산로 잘 갖춰진 아름다운 산이 버젓이 있는데, 왜 이 산을 클라이밍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나는 무어라 답할까. 사실 이유가 없다. 모르니까 그랬다. 잘 모르니까. 

좋아하는 폰트, 좋아하는 색감, 좋아하는 아이콘 스타일 등 다 채워넣으면 기가 막힌 예쁜 앱이 나올 줄만 알았지, 정체불명 디자인을 가진 앱으로 발전할지는 정말 몰랐다. 


"이 정도의 시행착오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실망하지 말아요."


'훈'이 말했다. 그러면서 좀 더 덜어내는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개발팀이 저를 죽이면 어쩌죠?"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게요."라는 답을 들을까 두려워 묻지 않았다. 

 

우리는 이 산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차근차근 나무를 그리기로 했다. 과감하게 버릴 건 버리자는 데 동의했고, 너무 낯선 느낌을 주지 않도록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버리고, 쳐내는 작업을 며칠째 하고 있다. 역시 나는 미니멀리스트는 체질이 아닌가봐. 애정하던 무언가를 버리는 건 너무 힘들다. '내가 이거 하나 생각해내려고 얼마나 고민한 줄 아세요?' 휴지통에 버릴 때마다 사연을 읊고 싶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17층 오피스에서 지하로 꺼져라 내쉬는 한숨에 '고'가 걱정이 되는지 말을 걸어주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는 힘들어요. 대표님이 생각하는 건 버전 4, 5쯤 넘어가야 실현되지 않을까요? 너무 완벽하게 시작할 수는 없어요."


나는 산사태 속에서도 사뿐사뿐 내려오고 싶었는지, 변명 아닌 변명이 흘러나왔다. 


"제가 말이죠. 책을 만들던 편집자여서 더 그런 건지. 미완의 상태로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게 견딜 수가 없어요. 책이 출간된 후 오탈자가 나오면 정말 자괴감이 들 거든요.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해!' 하는 상태로 내보내야 마음이 편해요."


산사태 속에서는 최대한 빨리 굴러내려오는 게 최고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가 말했다. 


그건 대표님이 착각한 것일 수 있습니다. 
책이 완벽하다는 착각!


뭐... 뭐?



'고'는 당황한 내 눈동자따위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대표님께서 가장 완벽한 상태의 책이라고 자부하고 세상에 내놓는다고 한들, 누군가는 미완이라 느낄 수도 있고요. 약간의 미완의 앱이라도 어떤 누군가는 완벽하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저는 세상 모든 일이 다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시험의 기술은 말이죠. 시간 안에 답안지를 작성해서 내는 것입니다. 100점을 맞으려고 시간 안에 답안지를 내지 못하면 그 시험은 빵점일 뿐이에요."


프로젝트도 결국 기간 안에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처음 나왔을 때도 버그가 4천 개가 넘었다고. 빌게이츠가 그 사실을 모르고 출시한 게 아니라고. 핵심적인 기능만 된다면 일단 내보내고 하나씩 해결하자 하였다고. 


"만약 그 버그를 다 해결하고 있었다면 아직까지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아... 지금 내가 빌게이츠로 빙의되어도 될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위안이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대체 나는 왜 그럴까



"저는 사람들의 비난이 좀 두렵나봐요. 어느날 갑자기 스타트업 하겠다고 출판계를 떠났는데,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고작 이거 만든 거야?' 이런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욕먹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어렵게 입을 뗐는데, 인간의 탈을 쓴 AI '고'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우리 앱이 아무리 멋지게 느껴져도 사람들은 칭찬하지 않을 겁니다. 비난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고요. 우주대스타에게도 안티는 있습니다. 원래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은 욕을 먹기 위해 하는 거예요. 어떤 일이든 그렇습니다. 욕 먹기 싫으면 일을 하지 말아야죠.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두 달여 지켜본 것이 전부이지만
대표님은 감히 누가 욕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하고 있습니다.



하... 여긴 힐링캠프인가. 



+등산 계획

새로운 산을 오르고 있다.
이 산은 맞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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