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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o Apr 17. 2016

"이 따뜻한 날에 우리 딸 학예회 갑니다"

하루 쉬는 신월동 치킨집 이야기

1년 전 즈음에 "금일 휴업"을 다르게 표현한 사진 열댓 장을 봤다. 재밌는 표현이 많아서 키득거리면서 봤다. 그중에 사진 하나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배경은 좀 허름한 동네 치킨집이다. 큰 문정도만 사진에 나왔지만 교촌치킨, 네네치킨 같은 프랜차이즈는 아닌 건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내가 열댓 살 일 때 열 번 조르면 아버지가 한 번 사주시던 만이천 원짜리 페리카나 양념치킨도 아니다. 정말로 영세한 동네 치킨집이다. 아마도 전 재산을 털어서 겨우 가게를 얻어서 아주머니 혼자 장사하실 것이다. 목 좋은 곳에 가게를 얻으려면 비싸기 때문에 분명 구석에 있을 것이다. 내가 전에 버스 탔다가 잘 못 내렸던 신월동이 제법 어울린다. 


개인적인 일로 하루 가게를 쉬시는 날이었나 보다. 금일 휴업이라고 써붙이긴 아쉬우셨는지 이렇게 쓰셨다.


이 따뜻한 날에 우리 딸 학예회 갑니다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하신 게 보이는데 글자 마지막 획이 바깥으로 휘는 걸 보니 엄청 설레셨나 보다.


학예회 날짜가 정해지자마자 따님이 아주머니한테 달려가서 꼭 와야 한다고 조그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을 것이다. 어제 밤에는 피곤한 아주머니한테 "엄마엄마 내일 꼭 와야 돼 알겠지?"라고 보챘을 것이다. 하루 장사를 쉬면 이번 달 생활비가 빠듯해지기 때문에 곤란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큰 마음먹고 딸 예쁜 모습 보러 가셨나 보다. 학예회면 연말, 빨라야 10월 즈음일 것이다. 날이 잠깐 풀렸는지, 아니면 딸 보러 갈 생각에 들뜨셨는지 날이 따뜻하게 느껴졌나 보다. 금일 휴업이라고 쓰실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자랑하고 싶으셨나 보다. 따님이 학예회에서 주인공은 아니었어도, 박자를 몇 번 못따라 갔어도 춤 신동이라며 엄청 대견해 보였을 거다.




힘들 때 보려고 저 사진을 다시 찾다가 못 찾았다. 사실 조금 찾다가 머릿속에만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해리포터를 소설로 보고 영화 봤을 때처럼 실망할까 봐.


단 한 번이라도 좋은 문장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마음에 독을 품고 책을 흘겨보다 보니 저 사진이 떠올랐다. 아주머니가 마음먹어서 저런 문장이 나온 건 아닐 거다.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마음에 독을 품는 건 포기해야겠다. 딸 학예회 갈 준비를 하는 아주머니의 마음을 품는 게 아무래도 빠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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