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o Feb 02. 2017

좋다고 말만 해도 좋아질까 봐.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요즘 기쁘게 바쁘다. 야무지게 쓴 문장들 맛보기에 바쁘다.

비문학만 지독히 편독하는 중에도 제목에 홀려서 읽었던 이서희 작가님의 유혹의 학교라던지, 김금희 작가님의 너무 한낮의 연애 같은 책은 말할 것도 없다. "들판의 꽃을 꺾듯 단어를 찾아주었지요" 같은 문장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브런치에서 접하는 글, 각 대학교 대나무 숲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오는 글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84』(조지 오웰 저)를 읽으면서 서글펐다. 단어를 정치적으로 만들고 비틀고 지워서 사고를 통제하는 부분 때문이다. 소설 속 이야기인데도 나의 즐거움을 뺏기는 것 같았다.



언어를 통한 사고 통제, double-plus-cold!

당이 국민을 지독히도 통제하는 사회의 이야기인데, 통제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축이 있다. 하나는 텔레스크린을 통한 통제인데, 최첨단 초고성능 송수신 CCTV라고 볼 수 있겠다. 다른 한 축은 '언어를 통한 사고 통제'이다.


이념적인 요구에 따라 불필요한 단어를 폐기하기 위해 '신어'라는 것을 만든다. 자유로운(free)로 '이 들판에는 잡초가 없다'라고 쓸 수는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politically free)' 또는 '지적으로 자유로운(intellectually free)'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런 용례는 없다. 자유, 평등과 관련된 개념은 '사상죄'로, 과학이나 객관성, 합리주의 관련은 '구사고'로 통째로 통폐합했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단어조차 규칙을 만들어서 단어 수를 줄였다. cold가 있으니까, warm은 uncold로 대체한다는 식이다. pluscold는 더욱 추운, doublepluscold는 더더욱 추운을 의미한다는 부분은 단연 최악이다.


이런 식이라면 If I rest, I rust 같은 맛있는 문장은 태어날 수가 없다. 이 문장은 70살이 넘으시는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이제 쉴 때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한 대답이라고 한다. '쉬면 녹슨다'로 주로 번역된다. 음운을 감안했을 때 '쉬면 (음식이 더위에 그러하듯) 쉬어버린다' 정도로 감히 번역해보고 싶다.

If I rest, I rust



신어를 만드는 전제는, 쓰는 단어에 따라 사고의 영역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머릿속이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라고 했을 때, 어떤 말을 한 번 하는 것은 몇 걸음 발자국을 내는 것이다. 몇 번 그렇게 말하다 보면 길이 되고, 그 길로만 생각이 흐르는 것으로 이해했다. 잘 닦아놓은 아스팔트 도로를 두고 거친 샛길을 가는 건 역시 마음먹기 쉽지 않다.


항상 '기특하게' 말하는 친구가 있다. 갑자기 문득 '나는 이 순간이 행복하고 감사해'라고 한다던가, 외국어 공부할 때에도 '나는 긍정적이고 성실하다'라며 예문을 읊는 식이다. 정말로 행복해하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해서, 진정성을 의심할 틈이 없다.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행복하다는 말과 생각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인다. 친구 이름을 따서 ㅇㅇ스럽다는 단어를 만들고 싶을 지경이다.



백성? 대중? 시민?

기왕이면 온건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써야겠다.

말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익숙지 않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선물을 줄 때도 '아나(여기 있다의 사투리)'라거나 '어머니 드릴 것 사는데 어쩌다가 같이 사버렸다'는둥 말에 영 성의가 없다. 내가 봐도 차암 별로다.


읽고 듣고 말하고 쓰는 단어의 어감을 헤아려야겠다.

어감이 특징적인 단어가 있다. 어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썼을 때, 그 단어가 품는 생각을 나도 모르는 새에 받아들이는 것이 무섭다. 정치인을 비롯한 수많은 '설득하는 사람들'의 발화에는 의도적이고 정치적인 어휘 선택이 깔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똑같은 사람도 시대 흐름에 따라, 백성, 국민, 민중, 대중, 시민으로 다르게 불렸다. 각 시대의 체제를 따르는 것이며, 사람을 보는 관점을 은연중에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계는 차치하자면, 그 관점에 철저히 물든 내 눈에 비치는 단어는 이러하다. 백성은 어리석어서 왕이 지배해야 할 대상, 민중은 부조리한 피해를 입는 노동자, 대중은 그저 모여있는 수동적인 다수의 무리이다.


볼 책 목록에 넣어놨던 『프로파간다』(에드워드 버네이스 저), 『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윤영미 저)를 당겨서 읽어야겠다.

『프로파간다』는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참고했던 책이라고 한다. 어떤 식으로 선동을 하는지 알아야, 당하지 않고 또렷한 맨 정신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예기치 않게 소설로 내가 요즘 느끼는 즐거움이 귀한 것임을 느낀다. '신어'가 없으니 지금을 마음껏 누리고 만끽해야겠다. 마음에 드는 노래가 있으면 100번 듣는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이 따뜻한 날에 우리 딸 학예회 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