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스물여섯의 가을, 꿈을 향한 첫걸음

by 박종호

원래부터 여행을 좋아했던 나는 정말로 많은 곳을 다녀봤다. 국내는 물론이고 혼자서 해외여행을 떠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유럽이라는 먼 대륙을, 그것도 27박 28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혼자서 여행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경험은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추억 중 하나가 되었다.

대학교 4학년이던 2021년,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 하나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멈춰선 듯한 시절, 나는 운 좋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온라인 수업과 일을 병행하며 보낸 그 시간들은 예상보다 여유로웠다. 캠퍼스를 거닐며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보내야 할 마지막 학기는 컴퓨터 화면 속으로 축소되었지만, 그 덕분에 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학업과 근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6월, 졸업장을 받아든 순간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확신이 자리 잡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대학교 졸업 시기를, 그저 평범하게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유럽 여행에 대한 꿈은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실천할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감사하게도 회사에서 양해해주신 덕분에, 나는 약 2개월이라는 귀한 시간을 온전히 여행 준비에 쏟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혼자 떠날 계획은 아니었다. 함께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고, 우리는 밤늦게까지 여행 루트를 짜며 설렘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현실은 꿈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친구는 결국 심리적 부담을 이유로 포기를 선택했고, 나는 예상치 못한 혼자만의 여행을 앞두게 되었다. 그 순간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아쉬움과 설렘, 두려움과 기대감이 뒤섞인 그 기분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지금도 가끔 친구에게 ‘너 그때 후회하지’라는 식의 말을 남긴다. 그만큼 유럽 여행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내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여행의 '목적'이었다. 막연한 유럽 여행이 아니라,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것들을 중심으로 여행을 설계하고 싶었다. 그 핵심에는 지중해와 카프리섬이 있었다. 수많은 영화와 책에서 봐왔던 그 푸른 바다를,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그 장관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메랄드빛 호수들이 계단식으로 이어지는 그 자연의 신비로움을 경험하고 싶었다. 이 두 곳이 나의 여행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핵심이었고, 모든 동선과 코스는 이를 중심으로 짜여졌다.

두 번째는 현실적인 문제인 '비용'이었다. 일은 했지만, 학생 신분으로 모은 돈은 한정적이었다. 27박 28일이라는 긴 여행을 위해서는 가성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국제학생증이었다. 이 작은 플라스틱 카드 하나로 항공료를 대폭 절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수십 개의 항공사 웹사이트를 뒤지고, 경유지와 시간대를 비교하며 찾아낸 최적의 루트—밀라노 인, 프라하 아웃, 왕복 110만원. 그 순간 나의 여행은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했던 것은 '계획'이었다. MBTI에서 J가 90에 가까운 성격의 내게 예상치 못한 변수는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지나치게 세밀한 계획이 여행의 자유로움을 해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유연한 계획'이었다. 큰 틀에서의 동선과 각 도시에서 꼭 봐야 할 것들은 철저히 조사했지만, 구체적인 예약이나 시간 배정은 의도적으로 비워두었다. 좋은 곳이면 더 오래 머물고, 아쉬운 곳이면 빨리 떠날 수 있는 여유를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여행 준비라고 해봤자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동선을 정리하고, 유명한 관광지들을 리스트업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여행의 시작이었다. 밤늦게 각 도시의 숨겨진 명소들을 찾아보고, 현지 맛집을 검색하며, 대중교통 노선을 파악하는 시간들. 구글 맵을 확대하고 축소하며 걸어다닐 골목길들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설렘이 가득했다.

짐을 싸는 과정도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27박 28일이라는 긴 여행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짐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야 했다. 매일 입을 옷을 다 챙겨갈 수는 없었기에, 세탁할 수 있는 곳들을 미리 조사해두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편한 신발이었다. 하루에 2만보 이상은 걸을 각오로 가장 편한 운동화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미적 감각도 중요했다. 물론 애초에 옷이 많이 없고, 패션 감각이 없는 나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써서 갔다. (평가는 남들이 하겠지만)

J 성향이면서도 천하태평한 나는 부족한 것들은 현지에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요즘 시대에 스마트폰과 카드만 있으면 웬만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막상 출발이 다가오니 작은 불안감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게 2021년 9월, 스물여섯의 가을이 시작되는 무렵, 나는 인천공항에 서 있었다. 백팩 하나에 꿈 하나를 메고,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장거리 여행길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야 실감이 났다. 정말로 혼자 가는구나. 체크인 카운터에서 여권을 내밀 때까지도 누군가 "같이 가자"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돌아갈 수는 없었다. 27박 28일 동안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를 거쳐 돌아오는 여정. 그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는 아직 모르는 채로 말이다.

탑승구에 앉아 있으면서 나는 지난 두 달간의 준비 과정을 되돌아봤다. 수십 개의 블로그를 읽고, 유튜브 영상을 보고, 가이드북을 뒤적이며 만든 나만의 여행 계획서. A4 용지 20여 장에 달하는 그 자료들이 지금 내 백팩 안에 들어있었다. 각 도시별 추천 코스, 대중교통 이용법, 현지 음식 리스트, 응급상황 대처법까지. 혹시 인터넷이 안 될 상황을 대비해 모든 걸 프린트해서 챙겨온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두려움과 설렘, 외로움과 자유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기대감이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27박 28일, 나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참으로 용감했다. 아니, 무모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용기 있는 첫걸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과 경험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넓어진 시야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 여행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한다. 한 청년이 꿈꿔온 유럽 대륙을 자신의 발로 걸으며 만나게 된 사람들, 풍경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