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밀라노, 예상치 못한 시작

by 박종호

긴 여정의 끝, 새로운 시작

서울에서 중동을 거쳐 밀라노로 향하는 긴 비행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평소 비행기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나는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몸을 맡겼다.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잠을 청해보려 애쓰고, 기내식을 먹으며 시간을 때우다 보니 어느새 긴 비행이 끝나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이탈리아의 대지를 내려다보며, 나는 드디어 실감했다. 정말로 유럽에 온 것이다.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새로웠다. 공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며 시내로 향하는 길, 에어비앤비 숙소가 있는 중심가까지의 여정도 설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여행의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시련: 작동하지 않은 유심칩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식사였다. 긴 비행으로 지친 몸과 오후 4시라는 애매한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고픈 배를 달래야 했다. 유럽에서의 첫 식사로 선택한 것은 케밥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앞으로 27박 28일 중 절반 이상을 케밥이 책임지게 될 줄은.

하지만 케밥의 맛을 음미할 여유도 잠시, 곧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한국에서 그토록 공들여 준비한 유심칩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와의 연락은 오직 메신저를 통해서만 가능했는데,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에어비앤비는 정확한 주소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략적인 위치만 알 뿐, 정확히 어느 건물의 몇 호인지는 호스트와 직접 연락해야만 알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숙소로 추정되는 건물 앞에서 한없이 서성였다. 호스트가 약속 시간에 맞춰 내려와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호스트는 집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고, 굳이 밖으로 나와 손님을 마중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첫 번째로 접근한 남성은 영어를 모른다며 그냥 지나갔다.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로 만난 중년 여성이 나의 구원자였다. 내 상황을 듣더니 친절하게 자신의 핸드폰을 빌려주었고, 덕분에 호스트와 연락할 수 있었다.

그렇게 힘겹게 숙소에 입성했지만, 또 다른 황당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1박만 예약했는데, 호스트는 6박 7일 예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예약 확인서를 보여주니 그제야 호스트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만약 그때 호스트가 끝까지 우기거나 확인서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정말 큰 낭패를 볼 뻔했다.


IMG_0025.HEIC 첫 식사로 먹은 케밥. 그리스식 우리가 아는 케밥보다는 햄버거 느낌에 가까웠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 이에 앞선 휴식

밤잠에 예민한 편인 나는 첫날만큼은 확실히 쉬겠다는 생각으로 1인실을 예약했다. 거실과 침실을 혼자 쓸 수 있는 구조의 공간이었다. 시차 적응에 비행기에서의 잠 부족, 거기에 연락 불통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모든 기력이 바닥났다.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분명 오후 5시였던 것이 눈을 뜨니 밤 9시가 되어 있었다.

원래 계획이라면 가벼운 낮잠 후 스포르체스코 성을 보러 나갈 예정이었는데,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여행 첫날부터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숙소와 유심 문제를 해결하고 기쁨의 셀카!


밀라노의 밤과 애국심

배고픔에 잠에서 깬 나는 바로 식사를 위해 나섰다. 미리 알아본 숙소 인근 파스타 집으로 향했지만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대안으로 생각했던 치킨집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숙소 근처는 포기하고 시내 중심가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밀라노 대성당으로 가는 길, 역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상상했던 밀라노의 모습이었다. 세련되고 현대적이면서도 어딘가 클래식한 감성이 공존하는 그런 공간.

대성당 광장에 도착하니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족 단위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특이한 광경도 눈에 띄었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든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조국을 위한 절절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이후 성명서 같은 것을 발표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고국을 향한 그들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마음 한편이 먹먹해지면서 동시에 안전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에 대한 감사함이 밀려왔다.

시위를 뒤로하고 나의 진짜 목적인 식사를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밀라노에서의 정식적인 첫 식사는 다소 의외였다. 바로 맥도날드였다. 햄버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각국의 맥도날드 메뉴를 경험해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 맥도날드의 햄버거는 어떤 맛일까?

식사를 마치고 밀라노 대성당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실 이전에 와본 적이 있어서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27박 28일 대장정의 첫 여행지라는 의미가 남달랐다.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을 바라보며, 이제 정말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IMG_0079.HEIC 밀라노의 웅장함에 다시 반했다.


‘아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밤길을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걱정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가장 큰 우려는 역시 안전 문제였다. 아직 건장한 청년이긴 하지만, 혼자 다니는 동양인이라는 점에서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여권과 휴대폰을 도난당하면 정말 큰일이 날 텐데, 이런 걱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여행에 대한 기대감도 점점 커져갔다. '아,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밀라노의 밤거리를 걸으며 느낀 이 감정은 앞으로 27일 동안 나를 이끌어갈 원동력이 될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상점에서 맥주 한 캔을 샀다. 평소 맥주를 즐기지 않지만, 시차 적응과 숙면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작은 방에서 혼자 마시는 이탈리아 맥주. 그것이 나의 유럽 여행 첫날밤을 마무리하는 의식이었다.

맥주 덕분인지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예상보다 험난했지만,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을 첫날이 그렇게 끝났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밀라노 탐험이 시작될 것이다.

IMG_0082.HEIC 이때부터 서양인들의 사진 실력을 믿지 못하게 됐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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