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혼자 걸은 피렌체, ‘낭만 합격’

by 박종호
IMG_0137.HEIC 냉정과 열정 사이의 피렌체. 너무나도 낭만있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나의 최애 도시가 된 피렌체

밀라노는 여행의 시작지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두근거리는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첫 도시였지만, 머물 시간도, 정을 붙일 여유도 없었다. 그저 본격적인 여행을 위한 준비 운동 같은 도시였다. 그리고 내 여행의 첫 목적지는 피렌체였다.

사실 나에게 피렌체는 ‘피오렌티나’라는 축구팀 외에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도시였다. 로마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고, 중간 기착지로 삼기에 ‘가성비’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일정을 짰을 뿐이었다. 유럽 여행을 준비하면서 피렌체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보긴 했지만, 막상 큰 기대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그런 도시에 그렇게 깊이 빠질 줄은, 정말 몰랐던 일이다.

밀라노에서 버스를 타고 피렌체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기 위해 유스호스텔로 향했다. 피렌체에는 유스호스텔이 꽤 많았고,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도시답게 가격대도 비교적 합리적이었다. 물론 나는 잠에 예민한 편이지만, '이 또한 여행의 일부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예약했다. 무엇보다도 여행자에게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이라는, 일종의 자기 암시도 곁들였다.

피렌체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도시 자체의 크기였다. 고대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에는 수많은 유적과 명소가 있었지만, 그 모든 곳이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 모여 있었다. 물론, 매일 3만 보 가까이 걸으며 발이 부르틀 정도로 다녔지만, 골목길을 걷는 경험 자체가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짐을 놓고 나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산 로렌초 성당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바로 사진이었다. 삼각대를 꺼내기도 번거롭고, 셀카로는 풍경이 담기지 않는다. 그렇게 셀카를 찍고 있는데, 어느 흑인 남성이 다가와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친절함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사진을 몇 장 찍어주더니, 내 핸드폰을 들고선 자신이 직접 만든 가죽 벨트를 사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거절하자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겠다며 은근한 협박을 했다. 당황스럽고 불쾌했지만, 핸드폰을 되찾기 위해 결국 30유로를 지불했다. 쓰지도 않을 벨트를 사면서 말이다.

그 순간 ‘와, 이게 유럽식 흥정인가?’ 싶었다. 돌이켜 보면 여행 초반부터 이런 일을 겪어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후 나는 모든 상황에 훨씬 더 경계심을 갖고 대처하게 되었으니까. 하나의 해프닝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분을 추스르기 위해 향한 곳은 현지에서 카르보나라가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이었다. 나는 크림을 사랑하는 크림 덕후였고,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는 입맛이었다. 큰 기대를 안고 주문했지만, 내가 받은 카르보나라는 내가 알던 그 맛이 아니었다. 한국식 카르보나라가 달고 부드러운 크림소스를 쓰는 반면, 이탈리아 정통 카르보나라는 계란과 페코리노 치즈, 관찰레로만 만든 짭짤한 음식이었다. 특히 관찰레의 짠맛은 한국인의 입맛에는 꽤 충격적이었다. 그제서야 인터넷에서 봤던 ‘이탈리아에서 한국식 카르보나라를 기대하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이탈리아에서 다시는 카르보나라를 시키지 않았다.

짠맛으로 가득 찬 입을 달래기 위해, 단짠단짠의 진리를 좇아 젤라또 집으로 향했다. 피렌체에는 5대째 운영되고 있다는 유명한 젤라또 가게가 있었다. 가게 앞은 이미 긴 줄로 가득했다. 사실 나는 젤라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떤 맛이 특별한지도 모르겠고, 그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능력도 없었다. 다만 다양한 맛이 진열된 모습과, 본고장에서 젤라또를 먹는다는 그 자체에 만족했다.


IMG_0109.HEIC 사기꾼 아저씨가 찍어주신 사진. 표정이 밝지 않은 이유는 날씨 때문~


‘나도 결혼할 수 있을까?’

젤라또를 손에 들고, 노을과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피렌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었다. 구글 맵을 보며 길을 찾는데, 가파른 오르막길과 험한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걸은 후라 발은 이미 지쳐 있었고, 노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도 “베키오 다리는 못 참지”라는 마음으로 다리 쪽에서 사진 한 장은 건졌다.

그리고 마침내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풍경이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붉게 물든 피렌체의 하늘, 아르노 강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 그리고 두오모 성당의 거대한 돔. 사진을 찍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 순간을 눈으로, 마음으로 온전히 담고 싶었다.

그 순간, 웨딩 스냅을 찍고 있는 한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미켈란젤로 언덕의 석양 아래에서, 사랑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봤다. ‘나도 언젠가 저런 곳에서 웨딩 사진을 찍고 싶다.’ 그 생각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 안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때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고 싶었을 정도로, 감정은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용히 해가 지는 그 순간, 나는 주변 중국인 커플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당시 오전의 해프닝을 겪은 터라, 그래도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중국어로 말을 건네자 그들은 꽤 놀라워했고, 흔쾌히 도와주었다. 그들이 찍어준 사진은 기술적으로 완벽하진 않았지만, 내게는 ‘인생샷’이었다. 그날의 감정, 풍경, 공기, 모든 것이 사진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언덕 위에서 두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풍경만 바라보았다. 두오모 성당과 베키오 궁전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밤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행복, 준비되지 않았지만 깊게 남은 추억이었다. 나는 원래 지중해를 보고 싶어서 이탈리아를 선택했지만, 이 도시 피렌체에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언젠가는 아내가 생긴다면 꼭 이곳에서 함께 웨딩스냅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피렌체 도시는 매우 아름다웠다. 언덕 위에서 본 전경도 예뻤다. 그러나 골목골목 길도 너무나도 예뼜다. 내가 지금까지도 피렌체를 사랑하는 이유다.


IMG_0142.HEIC 로멘틱했던 피렌체. 사진에는 다 안 담긴다...

교양도 채우는 남자

난 그림을 정말로 못 그린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똥손’이다. 미적 감각도 없는 것 같고, 손도 안 따른다. 물론 그림을 그릴 일도 없다. 대학교 1학년 때 서양 미술 수업 과제로 그림을 그렸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때도 손에 물감 묻히기 싫어서 고생했던 기억만 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술관, 박물관 가는 것을 좋아한다. 정말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면, 예술 작품 그 자체보다는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전시실 특유의 정숙한 공기, 고요 속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천천히 움직이며 작품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나도 뭔가 깊이 있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 말하자면, ‘교양 있어 보이는 나’를 경험하러 가는 셈이다.

사실 조각상은 조금 좋아한다. 형태가 분명하고 입체적이라 이해하기 쉬우니까. 그런데 그림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유명한 그림이라 해도 나에게는 다 거기서 거기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갔다. 피렌체까지 와서 우피치 미술관을 안 가는 건 실례라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도 여행 일정 중에 하루쯤은 조금 ‘지적인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나중에 누가 ‘피렌체 어땠어?’라고 물을 때, “우피치 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직접 봤지”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른 아침부터 한국인 가이드가 진행하는 미술관 투어를 신청했다. 혼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할 작품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그림 하나에도 이야기가 붙으면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확실히 설명을 들으며 보는 건 달랐다. 같은 그림이라도 ‘왜 이게 유명한지’,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그려졌는지’를 알게 되면 감상이 한층 풍부해지는 기분이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메디치 가문이 수백 년간 수집한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 말 그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보고였다. 미켈란젤로, 다 빈치, 라파엘로, 보티첼리… 예술 수업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물론 머릿속에는 다 담기지 않았다. 너무 많았고, 너무 방대했다. 다만 ‘내가 이런 공간에 있었다’는 기억,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투어는 아침 8시부터 점심 무렵까지 이어졌다. 발은 아팠지만 마음만은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예술에 대한 나의 무지가 조금은 채워진 느낌, 그리고 그걸 채우기 위해 시간을 썼다는 자부심 같은 게 남았다. 그 감정이 꽤 좋았다.

투어가 끝난 후에는 미리 검색해두었던 인근 햄버거집으로 향했다. 또 햄버거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또 햄버거였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햄버거가 아니었다. 피렌체 현지인들에게 인기 있는 수제 버거 가게였고, 고기의 육즙과 빵의 풍미가 탁월하다는 블로그 후기가 나를 유혹했다. 도착해서 받아든 햄버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미국식 햄버거와는 조금 달랐다. 햄버거와 케밥 사이 어딘가에 있는 느낌. 바삭하게 구운 빵 사이로 향신료가 섞인 고기 패티가 들어 있었고, 소스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맛이 났다. 이름 모를 치즈가 고소함을 더했고, 무엇보다도 ‘현지에서 먹는 맛’이라는 것이 주는 느낌이 참 좋았다.

그렇게 든든하게 한 끼를 먹고 체크아웃까지 마친 후 나는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IMG_0095.HEIC 랜드마크도 아름다웠지만, 골목들이 아름다웠던 피렌체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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