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 (1)
뮌헨을 방문하면서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느꼈는지 기록하고 공유하기 위해 작성하는 글입니다.
DAY1
06/23 - 월요일
전날, 아직 독일이라는 먼 나라로 떠난다는 실감이 들지 않아 미루고 미루던 짐 싸는 것을 저녁 늦게 겨우 마무리했다. 늦게 잠든 터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평소보다 더 힘들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출발 당일이 되니 슬그머니 흥분이라는 감정이 올라오는지 피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상태를 느끼며 짐정리를 마무리했고 차에 짐을 싣고 출발을 서둘렀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도로에 차들이 많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아침 출근길에 오른 차들이 많이 보였다. 여유를 가지고 출발한 터라 시간은 충분했지만 차가 없는 도로를 기대했었는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잠깐 머물렀다. 곧 집에서 온 전화에 아쉬움은 잊고 금방 반가운 목소리로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여느 부모님들이 하는 걱정을 일축했고 항상 잘해온 나를 강조하며 웃어넘겼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렵고 무섭지만 이럴 때만큼은 또 어른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우스운 일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캐리어 하나를 위탁수화물로 보내려 카운터를 찾았지만 너무 일찍 도착해서인지 아직 내가 출발할 항공편이 아닌 이전 시간의 항공편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꼼짝없이 30분 정도를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했다. 기대감, 설렘, 신남 등의 여러 감정이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였다. 나는 어떤 표정으로 저들을 마주했을지 되돌아보면서, 한편으로는 늘 있는 출장길에 오른 프로페셔널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약간 표정을 굳히며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설레는 표정을 보고 금방 슬그머니 웃음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어설픈 ‘척‘은 그만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냥 웃었다.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 최고다.
타고 갈 항공사 근처를 배회하다 독일로 가는 항공편의 대기줄을 안내하는 분이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독일로 가는 항공편도 지금 시작하냐고 물었다.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안내받았다. 원래 예정된 시간보다 좀 이른 시간이라 줄 선 사람이 많지 않아 얼마 기다리지 않고 티켓을 받고 위탁수화물을 보낼 수 있었다. 시작이 좋은 기분이다. 이번 일정이 마무리할 때까지 지금과 같은 기분이었으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출국 절차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려 식당들이 모여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바닥을 딛는 순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 내가 출국하는 날짜에 맞추어 다들 공항으로 온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이렇게 사람이 많을 수가 있을까. 식당대기줄이 어느 식당줄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히 서있었고, 책상과 의자는 사람들과 짐, 그리고 음식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테이블이 모여있는 곳 근처에 섰다. 식사를 마무리하는 테이블이 있는지 살폈지만 그런 테이블들은 이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타깃이 되어 본인 자리임을 은근히 티 내고 있었다. 기분 좋은 하루가 이렇게 무너지나 싶은 순간, 바로 앞의 바(bar) 형 테이블의 끝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수저를 정리하고 식판을 들고일어났다. 행복, 아마 그 순간의 기분을 표현하는 데는 이 두 글자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금방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곧, 저 긴 대기줄을 서서 기다려야 된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는 사라지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기분이 이렇게 쉽게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에 속으로 참 부끄러웠다.
식사 중에 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독일 출장이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언제 출발하는지는 기억 못 하고 있었는지 지금 공항이라고 하니 놀라는 눈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남겨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사갈 생각이 없다. 친절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나는 형으로써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생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
1등으로 줄을 섰다. 어디 가서 맨 앞에 서본 적이 없는데 다들 항공사 직원분이 안내하는 말을 다들 귀담아듣지 않아서인지 그냥 내가 먼저 가서 줄 서면 되냐고 물어보고 그 직원 앞에 바로 섰다. 물론 앞서서 비즈니스석과 프리미엄 이코노미석부터 입장하기 때문에 1등으로 탑승을 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먼가 1등을 했다는 사실에 바보 같지만 기분이 좋았다.
12시간 반. 탑승 후, 승무원이 방송으로 안내해 주신 예상 소요 시간이다. 예전 여행에서 슬리핑 버스 같은 이동수단을 2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타본 경험은 있었지만, 그땐 반쯤 누워서 타는 좌석인 데다 모든 좌석이 옆이 비어있는 형태라 다른 사람과 부딪힐 일이 없는, 나름 편안한 좌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는 뒤로 젖힌 앞자리, 잠에 취해 헤드뱅잉 중인 옆자리 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창가자리를 선택한 것이 무색하게, 해가 지지 않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창문덮개를 열 수 없다는 사실들로 머리를 아프게 했다.
비행기가 안전 고도에 이르고, 한두 시간이 지났을까 미리 꺼내두었던 독일어 책을 펼쳤다. ‘10시간 독일어 첫걸음‘, 10시간이라는 제목에 가는 동안 반만 봐도 많이 볼 수 있겠다는 오만으로 다른 책과 함께 미리 사둔 책이다. 12시간이 넘는 비행동안, 인터넷도 못쓰고 딱히 할 것도 없겠다 싶어 5시간은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 우습게도 30분, 딱 30분 보고 덮었다. 가장 앞쪽에 있는 인사말이 내가 읽고 속으로 따라 말해본 전부이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 30분 동안 본 표현을 아주 잘 써먹었다.)
점심 기내식 후에 후식 겸 해서 음료를 제공해 주었다. 메뉴판에 spirit(증류주)이 있길래 종류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물었고 진(Jin)이 있다고 해서 한잔 달라고 했다. 딱히 진을 좋아하는 것도 마셔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순간 그냥 ‘명탐정 코난’의 악당 이름이 진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궁금함에 진을 택했다. 그리고 한 모금 입에 머금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이건 음료의 카테고리에 두면 안 되는, 약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무슨 길 가다 보이는 잡초를 손으로 으깨서 나온 즙을 마신듯한 맛이 났다. 어쩐지 다른 음료들을 내줄 때와 달리 내 진은 컵 가득히 따라 주더라니. 이건 빨리 병을 비우기 위해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승무원 입장에서의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당당하게 spirit, 그중에서도 진을 선택한 순간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 잔을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명상을 하며 사이사이에 진을 홀짝였다. 반쯤 마셨을 때였나, 고역이었던 쌉싸름한 풀내음은 옅어졌고 오히려 상큼한 허브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 마시고 얼음만 남았을 때는 오히려 아쉬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한잔 더 달라고 할 만큼은 아니었는지 얼음을 입에 넣고 오독오독, 진의 잔향을 즐기며 마무리했다.
정말 웃긴 점은 비행 중에 와이파이를 공짜로 사용할 수 있었다. 웃기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때까지 스트리밍으로만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인터넷이 끊어지면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비행기 탑승하고 나서야 깨달았고 뒤에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한참 웃었기 때문이다. 와이파이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경로도 정말 웃겼다. 앞자리 좌석의 일행분이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일행들에게 전파하고 다니는지, 나도 슬쩍 엿듣고 알게 되었다. 그분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 해서 결국 음악도 듣고 카톡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일정에 나에게 알 수 없는 행운이 쫓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별거 아닌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기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그런 작지만 기분 좋은 행운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이파이의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카톡도 잘 보내지지 않았고, 음악도 어떤 곡들은 재생이 잘 되지 않았다. 아마 그분께서 일행에게 전파한 말이 결국 비행기 내 전체에 알려진 것이 아닐까 싶다.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웠다. 그분이 덜 부지런하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