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이에게

하얀 제비꽃은 바람에 꺾이는가 - 2화

by 침목

나는 크고 창백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제일종합병원]


병원간판은 언젠가 흰색이었던 듯 옅은 잿빛이었다. 병원 외부는 비교적 한적했다. 건물 뒤편을 둘러싼 소나무 군락이 비바람에 검게 일렁였다. 엄마는 어느덧 비를 맞으며 병원 입구에 다다르고 있었다.


“엄마!”


나는 뛰어가 엄마의 손에 든 장바구니를 빼앗아 들었다. 엄마와 할머니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정적은 커져만 갔다. 부자연스럽게 큰 엄마의 보폭에 맞춰 걷던 나는 잠시 서서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엄마의 젖은 어깨가 너울처럼 오르내렸다. 수건을 찾아 짐을 뒤적이는 사이, 엄마는 어느새 병원 복도에서 사라졌다. 나는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따라 걷다 낯익은 이름이 걸린 한 병실 앞에 멈춰 섰다.


[박용례]


열린 병실 문 사이로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침대 위에 쓰러지듯 기대어 울었다. 그리고 침대 위 파리한 안색의 할머니가 누워계셨다.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엄마는 숨도 채 쉬지 못하고 쓰디 쓴 바닷물을 쏟아냈다.


***


선자는 꽤 영특했다. 용례를 졸졸 따라 산이며 들에 피어난 산나물과 약초들을 줄줄 외웠으며, 어쩌다 한 번 집에 돌아온 범명이 들고 온 위인전이나 『새소년』같은 잡지들을 펼치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달달 읽어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더욱 명석한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얀 제비꽃 같은 딸년. 무엇이 그리도 재미난지. 선자는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을 성실하게도 습득했다. 용례는 그런 선자가 퍽 대견하기도, 불안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아들이 우선인 이 세상에서, 선자는 유일하게 앞서는 딸년이었기에.


“어매!”


낭랑한 여고생의 목소리가 이장댁 마당을 울렸다. 마당 한 켠에 자리한 감나무는 잎을 떨군채 맨몸으로 서 있었다. 부뚜막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뭉실뭉실 떠올랐다. 하얀 제비꽃 피듯 푸르른 하늘에 만발했다. 이윽고 용례가 마당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이! 내 새끼 왔는가!”


까맣게 그을린 용례는 선자를 보자 허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오늘도 쌀알은 몇 톨이나 안섞인 잡곡밥을 지어 먹여야 하는 처지였지만, 어린 딸년에게 근심 따위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용례는 뛰어들어오는 선자를 품에 안았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뛰어왔는지, 선자의 가슴팍이 동동- 울리고 있었다. 그 순간, 용례는 며칠 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


“이장댁 계시오-?”


용례는 바느질을 멈췄다. 아는 목소리였다. 용례는 건넌방 미닫이 문을 조용히 닫고 마루로 나왔다. 해거름판에 찾아온 이들은 방앗간댁과 떡집 김씨였다.


"뭔일이대?"

"일은."


방앗간댁이 집안을 슬쩍 둘러보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김씨도 따라 자연스레 앉았다.


"사과 달어. 드셔보셔."


용례는 사과가 담긴 그릇을 그들 쪽으로 밀었다. 그리곤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치들이 찾아온 까닭을 모르지 않았다. 까무룩 잠들었던 선자는 문풍지 너머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얼핏 선잠에서 깨어났다.


“암만해도 계집아 공부시켜서 뭣하요.”

“내말이 그말이요. 우리집 머스마 하나도 버거운 판인데...”

“.......”


그 때 선자가 마루로 나왔다. 선자를 발견한 방앗간댁이 손짓했다. 사과를 깎던 용례의 손이 잠시 멈췄다.


"선자야. 이리 와, 앉아봐라이."

"예."


잠이 덜깨 몽롱하던 선자가 용례의 곁으로 가만히 다가와 앉았다. 용례는 사과를 다섯 알째 깎아대고 있었다.


"선자야. 니 대학교 가지 말어."


선자는 잠이 싹 달아났다.


'이것이 무슨 소리여?'


선자는 달음질치려는 심장을 부여잡고 용례를 바라봤다. 용례는 무표정하게 사과를 깎고 있을 뿐이었다. 방앗간댁이 사과를 한 조각 씹으며 이어 말했다.


"너그 아부지 돼지농사도 어렵고항께, 대학교 갈 생각일랑 말어."

“암, 어차피 시집가면 그만일 계집것 공부시키는 것보다 낫지.”


당사자인 선자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일방적인 대화였다. 방앗간댁과 김씨는 마치 이 자리에 선자가 없는 것 처럼, 저들 멋대로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맞잡은 선자는 애타는 눈으로 용례를 바라봤다.


"...어매..."

"......."


용례는 기껏 깎아둔 커다란 사과조각 대신, 씨 근처에 겨우 붙은 과육을 칼로 도려내 입안에 넣었다. 그리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선자에게 제일 크고 단 사과조각을 쥐어 주었다. 대화 주제는 곧이어 자연스레 바뀌었지만, 선자의 앞날은 그 시대 대부분의 계집아이들이 그랬듯 예상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계집년에게 배움은 사치]


암만 날고 기어도 계집애는 할 수 없었다. 선자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