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펠리스, 체모곰파에서의 고도적응 여정
레펠리스, 체모곰파에서의 고도적응 여정
뜨거운 햇살, 얇은 공기
2019년 9월 8일 일요일.
국내외 수많은 트레일을 걸었지만, 단연 압도적인 첫손가락은 인도 히말라야 마카밸리(Markha Valley)이다. 황량하면서도 광활한 그 대지, 말이 안 나올 만큼 장엄한 산맥들. 그런데 더 강하게 다가왔던 건 그곳 사람들의 삶이었다.
욕심보단 순응, 경쟁보단 공존.
자연에 맞춰 살아가는 그들의 담백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내가 발 딛고 있던 세상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이 트레킹은 단순한 걷기가 아니었다.
때 묻지 않은 자연, 때 묻지 않은 사람, 그리고 그 속에서 나 역시 조금은 순수해졌던 시간.
게다가 이 길은 여름(6~9월) 시즌에만 열리는 ‘한정판 히말라야’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음은 없다.
6년이 지난 지금 25년에도 “여기가 내 인생 최고의 트레킹지다.”
숨도 안 쉬어지는 곳, 레(Leh). 공항의 고도가 이미 해발 3,500m
마카밸리 트레킹을 하려면 인도 인도령 카슈미르의 라다크 지역에 있는 ‘레’라는 도시로 가야 한다. 인천공항에서 인도 델리 공항을 경유해 레 공항으로 갈 수 있다. 라다크는 해발 3,000 m가 넘는 고원 지대고 히말라야산맥과 인더스강 상류에 걸쳐 있다. 레 공항의 고도 역시 3,500m이다. 레에 도착하니 우리나라 가을처럼 뽀송하고 쾌적한 공기가 느껴지면서 동시에 살짝 어지러웠다. 고산증세가 바로 시작된 것이다. 산소는 줄었고, 과자 봉지는 펑! 하고 부풀어올랐다.
몸이 그 즉시 반응했다. “여긴 평지가 아니야. 고산이야.”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모든 불편함을 압도했다.
맑고 얇은 공기 속 강렬한 태양, 끝도 없이 솟은 히말라야 고봉들.
강렬한 태양. 깨끗하게 파란 하늘. 사방의 고산 산맥. 살아 숨쉬는 듯한 레의 첫인상은 환상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도 적응을 위해서 레에 도착한 날 즉시 트레킹을 하지 않고 하루 이틀 정도 레 시내를 둘러본다고 한다. 우리도 첫날은 다른 일정 없이 마카밸리 투어 신청만 하고 식사를 한 뒤 냉큼 호텔에 들어갔다. 몸이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 이게 고산에서는 생존의 첫 단계다.
체모곰파, 히말라야 트레킹의 예행연습
레에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햇살이 매우 강렬한 이곳은 새벽 6시면 벌써 대낮처럼 밝다.
고산 적응과 관광을 겸해 레 팰리스와 체모템플TSEMO temple에 다녀왔다.
레 팰리스는 레 마켓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이다. 입장료가 5천원정도 하지만, 왕궁의 내부와 레 시내를 멋지게 볼 수 있으니 무조건 꼭 가보기를 추천한다.
레 팰리스는 라다크 왕국 당시의 궁전이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상태다. 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꼭 한 번 들를 만하다. 고요하고 낯선 풍경. 먼지 낀 듯한 마을 위로 맑은 하늘이 파랗게 얹혀 있었다.
체모템플은 레 팰리스보다 더 높다. 오르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은 건조한 흙길이라서 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고산지대 트레킹 맛보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가파른 경사도다. 하지만 레 시내를 한층 더 넓은 폭으로 볼 수 있어 오를 가치는 충분하다.
숨은 턱턱 막히고, 다리는 후들거리지만, 꼭대기에 오르자 세상이 확 열렸다.
바람에 펄럭이는 오색 깃발, 타르초가 우리를 맞이했다.
체모템플 근처에는 큰 타르초가 있다. 불교의 경문이 쓰인 오색 깃발인데 바람을 타고 진리가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이는 바람 속에 나도 함께 섞인 듯한 기분이었다.
레는 낡고 오래돼 먼지가 쌓여 있지만 단정한 나무 서랍장을 떠올리게 했다.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관광객들에게 호객행위를 하지 않아 네팔 카트만두나 포카라보다 훨씬 평화롭고 편안했다. 나는 지금, 마카밸리를 향해 한 걸음씩, 그리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 – 인도 마카밸리 #1. 시작부터 고산, 시작부터 벅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