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43

by HaJae

늘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어김없이 연락이 온다.
“이번엔 며칠에 갈까?”

한 해 동안 꼭꼭 담아뒀던 말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질문 하나에 서서히 고개를 든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쌓아두고, 굳이 짊어진 채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벼룩시장 마냥 모든 걸 풀어헤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장소는 항상 똑같다.
수많은 해수욕장 중에서도 유난히 특별한 곳.
그 바닷가 근처에 있는 조개구이집 중에서도
삼겹살만 파는 단 하나의 집.

조개구이집 간판을 달고 삼겹살을 파는,
조금은 괴상하고 조금은 반가운 그 공간이
우리에겐 매년 되풀이되는 작은 오아시스다.


간판도 정겹고, 이름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우리 둘 다 조개구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메뉴판에서 주저 없이 삼겹살을 고르고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낸다.


매년 오지만 사장님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꼭 말한다.
“저희 1년에 한 번은 꼭 와요. 내일 해장하러 또 올 거예요.”

그 말에도 사장님은 웃기만 하지만,
우리끼리는 그 작은 순간이 나름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이곳을 기억해 달라는 것보다, 우리가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확인이 더 소중해서.


잔을 따르기 전에 아무 말 없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묻지 않아도 말은 처음엔 가볍게 흐른다.


회사 얘기, 사람 얘기, 사는 이야기, 돈 이야기, 부모 이야기.
하지만 잔이 한두 번 돌고, 침묵이 한 번 자리 잡으면,
그제야 보따리 깊은 곳에 넣어뒀던 진짜 말들이 하나둘 꺼내진다.


“나 요즘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잘하고 있긴 한 걸까?”
“뭘 잘하고, 못하고 가 뭐가 중요해. 우린 살아있잖아.”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철학을 마주하게 된다.
자꾸만 생각이 말보다 길어지고,
잔잔하게 깔린 파도 소리는 이젠 배경이 아닌 하나의 공기처럼 흘러간다.


“내년엔 뭘 할까?”
“어쩌면 우린 그러기 위해 태어난 걸 수도 있어.”
“아니야, 그냥 우주의 먼지일 뿐이야.”


누가 봤을 땐 이상한 말들이지만,
우리 사이에선 그 어떤 문장보다 진심이 담긴 말이다.

그렇게 꺼내 놓은 말들로 배를 만든다.

이야기라는 이름의 작은 배.
그리고 그 배를 새벽 바다 쪽으로 밀어놓듯,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숙소로 돌아와 잠에 든다.


아침이 밝으면,
우리는 늘 같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순두부찌개 먹으러 가자.”
“갈 때 걸어가자.”
“내년엔 여기 말고 다른 곳 가볼까?”
“고깃집은 어떡하고 그러면.”
“아… 그것도 그렇네.”


같은 말, 같은 고민, 같은 결론.
하지만 그 안엔 우리가 한 해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바다는 그대로인데, 우리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바다의 소리는 여전히 잔잔하고,
고깃집 간판도 그대로,
냉장고의 소주도 그대로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말의 결은 조금 더 깊어졌고,
머뭇거리는 속도의 리듬은 조금 더 느려졌다.

변하는 건 결국 우리 자신 뿐이라는 걸,
이 여행은 매년 새롭게 알려준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이유는,
딱 한 가지면 충분하다.


“삼겹살 먹으러 갈래?”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또, 떠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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