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함의 불씨가 다시 지펴지는 순간
무기력의 나날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이환은 조금씩 채영과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 이제 채영이는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하루하루 출근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꿈은 마음과는 다르게 작동했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머리의 지끈거림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과거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이환은 그 징조를 보아도 누군가를 돕기 위해 몸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정해진 불운이 타인을 덮치는 과정을 흑백 사진을 보듯 무표정하게 관조했다.
회사에서는 최소한의 업무만을 처리했고, 퇴근 후에는 방 안에 틀어박혀 멍하니 TV를 보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길거리에서 넘어진 아이나 카페에서 쏟아지는 커피 같은 사소한 예지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그저 운명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방치했다.
그렇게 죽은 듯 지내던 일상에 봄이 찾아왔다. 싱그러운 공기와 함께 회사에도 신입사원들이 입사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이환의 눈에 들어왔다. '김보미' 사원이었다. 이름처럼 그녀는 이환의 메마른 일상에 찾아온 또 다른 봄 같았다.
이환은 김보미의 사수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회사 동료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채영과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미는 이름이 가진 마력처럼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사람이었다. 긍정적인 에너지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와 온종일 붙어 지내다 보니, 이환의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일상을 회복해 가던 어느 날 밤, 잠이 든 이환은 이전과는 결이 다른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거대한 코인 그래프가 보였다. '도깨비코인', 28년 5월 2일 11시, 수익률 2000% 상승. 누군가 그의 뇌리에 정보를 강제로 주입하듯 상승 폭과 시점이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뭐지? 이건 지금까지와는 달라.’
출근하자마자 이환은 최강호 대리를 붙잡고 물었다.
"야, 강호야. 너 혹시 도깨비코인이라고 들어봤어?"
최강호는 여전히 이환이 화냈던 일에 앙금이 남은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 과장님. 들어는 본 것 같네요."
"야, 강호야. 그때 내가 화낸 건 미안해. 그냥 편하게 해. 그래서 그 코인 어떤데?"
"도깨비코인? 그거 요즘 도박판이나 다름없어요. 하지 마세요. 전 재산 날린 사람 수두룩합니다. 이건 인생 선배로서 조언이에요."
최강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환의 머릿속에는 꿈에서 본 그 정교한 그래프가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정확한 날짜와 시간. 이것은 놓칠 수 없는, 아니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마침내 5월 2일이 되었다. 이환은 코인 앱을 실행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도깨비코인에 쏟아부었다.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각, 스마트폰을 쥔 그의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10시 40분을 지나 11시에 가까워지자, 익숙한 지끈거림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정지해 있던 그래프가 수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100%, 500%, 그리고 마침내 2000%.
"됐다! 진짜 됐어!"
이환은 사무실 복도에서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떨리는 손으로 매도 버튼을 눌렀다. 계좌에 찍힌 숫자는 그가 평생 구경도 못 해본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다음 날, 이환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달라지자 동료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이 과장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는 사람 같더니 왜 저렇게 신났어?"
그는 성공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과시하고 싶었다.
"아, 투자한 코인이 좀 잘됐어요. 운 좋게 돼지꿈을 꿨거든요."
이내 소문은 사내 전체로 퍼졌고, 사람들은 그에게 비법을 묻기 위해 줄을 섰다. 무기력했던 방관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화분 사건이 '운 좋은 시민'으로서의 우연이었다면, 이번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쟁취한 결과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 나는 특별해. 운명을 내 손으로 굴릴 수 있는 존재야.'
오만함이 다시 독버섯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코인으로 얻은 부와 주변의 찬사 속에서 채영을 잃은 슬픔을 완전히 잊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능력을 향한 더욱 광적인 집착과,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한 위험한 확신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