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무기력한 방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옥

by 덜자란사십대


채영과의 이별 후, 이환의 세계는 채도가 빠진 흑백 필름처럼 변해버렸다. 쨍한 햇살도, 거리의 활기찬 소음도 그에겐 불쾌한 자극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방 안에서 그는 며칠째 침대에 눌어붙어 있었다.


‘다시 연락하면, 한 번은 받아주지 않을까.’


이환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었다. 화면에 뜬 '채영♡'이라는 이름이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단호할 수 있을까.


—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냉정한 기계음이 고막을 찔렀다. 채영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환은 차가운 화면 위로 눈물을 떨구며 무너져 내렸다. 회사에는 당분간 휴가를 냈지만, 텅 빈 집안은 오히려 그를 더 깊은 늪으로 밀어 넣었다. 사고 후 병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제 손을 잡아주던 채영의 온기가 아직도 손등에 선명한데, 현실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어질러진 옷가지, 말라비틀어진 컵라면 용기, 그리고 구석에 처박힌 채영과의 사진들. 그 난장판 속에서 홀로 빛나는 것은 무심하게 켜진 TV 뉴스였다.


— 한명석 의원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위기 속에서 시민 영웅의 도움으로 살아난 뒤 지지율이 급등하며….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구한 한명석 의원은 저렇게 승승장구하며 대권까지 노리는데, 정작 내 곁의 단 한 사람은 지켜내지 못했다는 허탈감이 독기처럼 온몸에 퍼졌다.


그날 밤, 이환은 아무런 기대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미래를 엿보는 꿈은 이제 설렘이 아닌 저주였다. 하지만 꿈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왔다. 꿈속에서 최강호의 새 전기차가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서 있었다. 이환은 꿈속의 그 장면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길, 어김없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회사 근처 대로변에서 꿈속에서 보았던 흰색 전기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미치겠네! 차가 왜 이래? 산 지 얼마 됐다고!"


최강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평소라면 미리 연락을 해주거나 옆에서 도와줬겠지만, 이환은 그저 죽은 눈으로 그 곁을 지나쳤다. 최강호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려 했으나, 이환의 서늘한 뒷모습에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사내에서는 이미 이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 대리님 요즘 왜 저래? 예전엔 그렇게 의욕 넘치더니, 완전 딴사람 같아."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며. 사람이 독기가 올랐더라고."


이환은 그 모든 수군거림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모든 것이 의미 없었다. 며칠 후에는 비 오는 날 횡단보도에서 버스가 튀긴 물에 흠뻑 젖는 커플의 꿈을 꾸었다. 역시나 현실은 꿈의 궤적을 벗어나지 않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거리, 이환은 묵묵히 그 커플의 뒤를 따랐다. 버스가 거세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입을 닫았다.


— 쏴아악!


굉음과 함께 구정물이 커플을 덮쳤다. 온몸이 젖어 당혹해하는 그들을 보며 이환은 속으로 뇌까렸다.


‘내가 너희를 도와준다고 채영이가 돌아올까? 채영이의 마음도 못 바꿨는데, 이런 사소한 것들을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제 그는 단순히 무기력한 자가 아니었다. 정해진 불운을 지켜보며 즐기는, 혹은 그 불행에 동참하는 방관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야, 이환. 이제 채영이는 그만 잊어. 언제까지 그렇게 바보처럼 굴 거야?"


점심시간, 참다못한 최강호가 조언을 건넸다. 친구로서 던진 위로였으나, 날이 서 있던 이환에겐 발화점이 되었다.


"야,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아는데 나한테 훈계질이야!" "뭐…?" "그리고 나 너보다 선임이야. 어디서 반말이야? 과장님이라고 불러, 이 자식아!"


이환의 고함에 식당 안의 시선이 집중됐다. 최강호는 뻘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과장님. 제가 죄송합니다."


돌아서는 최강호의 뒷모습을 보며 이환은 찰나의 후회를 느꼈지만, 이내 그 감정마저 귀찮아졌다. 그는 그저 머리를 짓누르는 지끈거림을 견디며 제 자리에 앉았다.


세상은 흘러가고, 꿈은 반복된다. 이환은 꿈의 내용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세상이 망가지든 누군가 불행해지든 관심 없었다. 능력은 여전히 미래를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의지는 사라졌다. 그는 그저 다가올 미래의 파편들을 멍하니 지켜보는, 가장 잔인한 관찰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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