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랑의 유통기한

정해진 이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순간

by 덜자란사십대


그 사건이 있고 며칠 뒤, 이환은 채영을 만났다. 유명세는 생각보다 지독했다. 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시선들을 피하기 위해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모습은 흡사 도망자 같았다. 약속 장소에 앉아 있는 채영의 얼굴은 며칠 전 카페에서의 울음 흔적이 가시지 않은 듯 여전히 침전되어 있었다.


"TV에도 나오고, 이제 진짜 유명인 다 됐네."


채영의 말투에는 축하 대신 짙은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전능감에 취해 있던 이환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세상과 달리 냉소적인 그녀의 태도가 가시처럼 돋아났다.


"채영아, 너까지 그러지 마. 나 지금 충분히 피곤하고 부담스러워."


이환의 날 선 반응에 대화는 끊겼고, 무거운 침묵이 테이블 위를 메웠다. 채영은 애써 화제를 돌리려 억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이번 여름에 여행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너 퇴원하면 축하 의미로 해외로 가자고 했었잖아. 어디 갈지 생각해 봤어?"


이환은 아차 싶었다. 유명세와 예지몽에 취해 그녀와의 약속은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불안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혹시라도 인생을 바꿀 중요한 예지몽을 놓치게 될까 봐, 혹은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현장에 있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채영아, 이번엔 그냥 가까운 국내로 다녀오면 안 될까? 내가 요즘 좀 상황이 그렇잖아."


이환은 그녀의 눈을 피하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채영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기대가 실망으로, 실망이 다시 체념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러자. 너 요즘 많이 바빠 보이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그녀의 순순한 대답에 이환은 안도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사랑하는 연인의 체념보다 앞섰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채영의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에도 그는 이 능력이 자신을 완벽한 인생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날 밤, 기대를 품고 잠자리에 든 이환은 생각지도 못한 꿈을 꾸었다.


꿈속의 채영은 평소와 달리 처연하리만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녀는 이환을 향해 힘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 우리 이제... 그만 끝내.


"안 돼!"


이환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여태껏 꾸었던 그 어떤 예지몽보다 선명하고, 차원이 다른 불길함이었다. 강아지의 죽음이나 의원의 사고보다, 연인의 이별 선언은 그의 세계를 뿌리째 뒤흔드는 공포였다.


다음 날부터 이환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도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간호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강아지의 운명도, 유력 정치인의 사고도 바꿨는데 연인의 마음 하나 못 바꿀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취소했던 해외여행을 다시 추진하고, 그녀가 평소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결제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예지몽만큼이나 비정했다.


여행 당일, 조용한 국내 휴양지를 찾았음에도 사람들은 귀신같이 영웅 이환을 알아봤다. 식당에서도, 산책로에서도 무례한 카메라 플래시와 사인 요청이 쏟아졌다. 두 사람만의 대화는 불쑥 끼어드는 타인의 목소리에 매번 갈기갈기 찢겼다.


"안녕하세요, 혹시 뉴스에 나온 이환 씨 맞으세요?"


그 물음이 들릴 때마다 채영의 얼굴은 한 뼘씩 더 멀어졌다. 이환은 절망했다. 유명세라는 훈장은 연인과의 시간을 갉아먹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가 옆에서 웃고 있어도, 이환의 귀에는 꿈속의 그 차가운 목소리만 환청처럼 맴돌았다.


여행지의 마지막 저녁, 하루 종일 소음과 시선에 시달린 두 사람 사이에는 칠흑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환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말을 뱉었다.


"미안해. 조용한 곳을 찾고 싶었는데, 여행이 여행 같지 않았지?"


이환의 떨리는 눈빛을 보며 채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야, 좋았어. 의미 있는 여행이었던 것 같아."


그 '의미'라는 단어가 이환의 심장을 찔렀다. 그것은 시작이 아닌 끝을 정리하는 자의 말투였다. 이환은 필사적으로 다음 날의 일정을 꺼내며 도망치려 했지만, 채영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환아, 나 할 말이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꿈속의 그 톤과 일치하는 순간, 이환은 깨달았다. 운명은 한 번도 비껴간 적이 없었음을. 그의 눈에서 이미 낙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채영은 정해진 대본을 읽듯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선고했다.


"우리 이제... 그만 끝내."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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