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의 공존과 진화에 대하여
최근 현대자동차의 로봇 공학이 빚어낸 ‘아틀라스(Atlas)’의 움직임을 목격한 이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술이 많이 발전했구나”라는 감탄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고 불편한 감각. 우리가 오랫동안 ‘인간의 영역’이라 믿어왔던 경계선 하나가, 소리 없이 허물어지는 순간에 가까운 감정이 더 정확할 겁니다.
과거의 로봇이 삐걱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정해진 궤적을 따라 직선적으로 움직였다면, 오늘의 아틀라스는 관절의 물리적 한계를 비웃듯 몸을 비틀고 인간보다 더 정교한 균형 감각으로 험준한 지형을 돌파합니다. 넘어질 법한 순간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자세를 회복하며, 마치 중력과 대화하는 존재처럼 공간을 통과합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더 이상 ‘기계를 조종한다’라기보다는, 어떤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 강철의 신체는 이제 매끄러운 화면 속에 갇힌 픽셀의 집합이 아닙니다. 우리와 동일한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공기를 가르고, 시공간의 한 축을 점유하는 실체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세계에 발을 디딘 하나의 몸, 하나의 질량, 하나의 무게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경탄해야 할 지점은 아틀라스의 화려한 백플립이나 유연한 관절 구동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핵심은 그 압도적인 피지컬이라는 그릇 안에, ‘스스로 사유하고 학습하며 진화하는 지능’이 깃들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있습니다. 신체를 가진 지능, 그리고 세계와 직접 부딪히며 경험을 축적하는 존재의 출현. 그 찰나에 우리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신대륙의 해안선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기술 시연이 아닙니다. 전편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인공지능이 물리적 신체를 입고 우리의 일상으로 걸어 들어오는 ‘실존적 조력’의 시대가 이미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명백한 징후가 아닐까요.
이제 그는 내 곁에서 커피를 내리고,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 올리며, 인간이 오롯이 사유에 몰입할 수 있도록 물리적 토대를 단단히 다져줍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우리 앞에 놓인 진정한 신세계는, 과연 여기까지 일까요?
우리가 인공지능을 이 지점까지 데려온 이유가 단순히 생활의 편의를 몇 단계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을 리는 없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더 멀리 있습니다. 인간의 지능과 인공지능이 서로의 결핍을 메우며 하나의 거대한 ‘공동 사유체’로 진화해 가는 과정, 다시 말해 ‘지능의 공존’이라는 고차원적 도약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다름’이 품고 있는 힘을 과소평가합니다. 어느 한쪽만이 옳다고 믿는 폐쇄성 속에서는, 진보가 움틀 틈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개인의 성장도 그렇지만, 사회 공동체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도 ‘다름’은 반드시 필요한 자양분입니다. 인간과 인공지능 역시 본질적으로 다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다름’이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다름’이 지닌 놀라운 연금술입니다.
인간의 지능은 태어날 때부터 ‘결핍’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안개처럼 쉽게 흩어지고, 판단은 때때로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방향을 잃습니다. 하지만 이 결핍은 곧 열망의 씨앗이 됩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상상하고, 흩어진 기억의 파편을 이어 예술을 빚어내며, 차가운 논리를 넘어서는 직관으로 도약합니다.
반면 인공지능은 ‘무결점의 논리’를 지향합니다. 수조 개의 데이터를 순식간에 관통하는 광활한 사유의 바다를 품고 있지만, 그 바다를 왜 항해해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지’와 ‘존재적 목적’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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