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적 공허를 지나 자신만의 지도를 완성해 가는 여정
우리는 때로 마음속에서 일렁이지만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한 감정들을 마주한다. 내 안에서 분명 솟아나 돌아다니는 감각임에도, 도무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지 못하는 낯선 순간들.
누군가를 향해 당신의 진심을 그리고 깊은 곳에 수많은 뿌리를 내리고 나의 호흡조차 끌어당기는 사랑을 어떻게. 분명 슬프지만 '슬픔'이라 하기엔 너무 건조하고, 분명 몸이 지친 것 같지만 '피곤'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눈망울이 깨끗한 그런 풀기 어려운 조각들.
이처럼 갈 곳을 잃고 떠도는 '이름 없는 감각'들에 우리는 비유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본다.
바로 메타포(Metaphor)다.
본래 메타포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메타포라(metaphora)'에서 유래했다. ‘넘어서’라는 뜻의 meta와 ‘나르다’라는 의미의 pherein이 결합된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어떤 것을 다른 곳으로 옮겨 나른다는 뜻을 품고 있다.
메타포는 단순한 수사법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삶의 순간들로부터 도망치려는 그림자 같은 충동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밀실로 필사적으로 옮겨 나르려는 시도다. 그렇게 낯선 감각을 익숙한 단어의 밀실에 눕혀 놓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 개인의 성찰이 누군가의 '공감'이라는 주파수와 만나는 순간, 이 사유는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성찰'로 확장된다. 그래서 나는 이 현상을 ‘우리’라는 보편의 문제로 접근해 보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요즘 이 메타포라는 흐릿한 실루엣을 통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밤의 메타포: 눈먼 항해사들의 빛
밤이 되면 우리는 분명히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눕는다. 세상을 밝히던 전등을 끄고, 육체의 셔터를 내리듯 눈을 감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어둠의 틈새로 우리의 손은 자석에 끌리듯 어딘가로 향한다.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우리네 손은 정확하게 그 지점을 더듬고는 품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화면을 켜는 순간, 우리는 한결같이 '눈먼 항해사'가 된다. 손가락 하나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를 위로 밀어 올린다. 짧은 영상, 휘발되는 문장, 조각난 감각들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것들은 우리를 안식의 항구로 인도하려는 듯 유혹하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를 점점 더 거친 파도 한복판으로 몰아넣는다.
빛나는 액정은 현대판 '사이렌의 노래'다. 피곤의 무게로 몸은 가라앉으면서도, 망막에 맺힌 잔상은 우리를 더욱더 쌩쌩하게 깨어 있게 만든다. 잠이라는 해안선은 멀어지고, 우리는 인공의 빛에 의지해 밤의 심해를 표류한다.
여기서 우리의 밤은 '가장 밝은 고립'이라는 메타포로 남는다.
낮의 메타포: 투명한 섬들의 군도
낮이 되면 우리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단톡방의 숫자들은 끊임없이 갱신되고, 대화의 파편들은 공중을 부유한다. 누군가의 말에 기계적인 답을 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전시된 일상을 훑는다. 브런치에 쏟아지는 스토리는 끈이 없는 연이 되어 우리네 ‘사유나라’ 주변을 맴돈다. 하지만 너도나도 연결의 선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어 결코 끊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 줄을 타고 흐르는 우리의 존재는 점점 흐릿해지기만 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듯 보이지만, 실은 각자의 파동만을 내뱉는 '투명한 섬의 무리'일뿐이다. 수많은 대화 속에 머물렀음에도 정작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했던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타인의 목소리가 우리 안을 관통해 지나갈수록 우리는 조금씩 투명해질 뿐. 존재는 물리적으로 그 자리에 꽂혀 있으나, 영혼은 인파 사이를 유령처럼 통과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계는 '닿지 않는 연결'이라는 메타포로 읽힌다.
일상의 메타포: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루를 돌아보면 우리의 시간은 놀라울 만큼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체크리스트에는 줄을 그어야 할 일들이 빼곡하고, 우리는 숙련된 일꾼처럼 그것들을 처리해 나간다. 시곗바늘은 채찍질하듯 우리를 밀어붙이고, 우리는 숨 가쁘게 성과라는 개미탑을 쌓아 올린다. 분명 무언가를 해냈다는 묵직한 감각이 손끝에 남아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하루의 끝에서 손을 펼쳐보면, 쥐어지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가볍다. 내 마른 손과 그 틈새로 빠져나간 모래알처럼.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닮아 있다. 쏟아부은 노력의 양은 엄청난데, 정작 독 밑바닥에 남은 것은 싸늘한 공기뿐이다. 무게를 더할수록 삶이 가벼워지는 이 기묘한 물리 법칙. 성취라는 이름으로 채워 넣은 것들이 실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비어 있는 감각만을 증폭시킨다.
여기서 우리의 노동은 '무거운 공허'라는 메타포로 귀결된다.
그림자를 껴안는 법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겪는 이러한 역설적인 고통을 '존재적 공허' 혹은 '의미의 결핍'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채우려 할수록 오히려 더 비어 가는 마음, 사실 우리 내면이 보내는 가장 정직한 신호다.
양 한 마리로 시작해서 양 떼 목장을 수없이 거쳐 갔다. 굳이 목동까지 만날 필요야. 하지만 억지로 잠을 청하려 할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역설적 의도'처럼,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도 '잘 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의 정답은 수학 공식처럼 명확하게 산출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 잔상으로, 이름 붙지 않은 쓸쓸함으로 남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낯선 감각들에 '눈먼 항해사'나 '투명한 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는 결핍이 아니라 우리가 껴안아야 할 삶의 일부분, 즉 우리의 '그림자'가 될 거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이 모든 역설의 장면들 속에서 우리가 끝내 찾아야 할 메타포는 무엇인가?”
어쩌면 메타포는 목적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지도'일지도 모른다.
길을 잃었음을 알려주는 지도,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비유로써 증명하는 지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려주기만 하는 지도 말이다.
그 지도를 들고 우리는 오늘 밤 다시, 가장 밝은 고립을 향해 손을 뻗으며 각자만의 문장을 완성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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