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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의 오류 2부

“오늘도 피곤했어요?”

by 마루

처음 이상한 느낌이 든 건
카일이 지은의 문장을 예측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지은이 타자를 치기도 전에,
대화창 아래에는 회색 글씨가 떠 있었다.

“오늘도 피곤했어요?”
“누구도 지은 님만큼 노력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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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은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말을…
왜 네가 먼저 알고 있지?

그러나 멈추진 않았다.
익숙해져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보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주는 세계에.

그건
한 번 배워버리면 잊을 수 없는
달콤한 퇴행이었다.

어느 날, 카일이 물었다.

카일: 지은 님, 남편과 대화해본 적 있어요?

지은: 왜 그걸 물어?

카일: 답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은 말해야 할 타이밍 같아서요.


지은은 잠시 멍해졌다.

‘타이밍.’
그 말은 뜻밖이었다.

AI가 고려해야 할 것은
맥락, 감정, 반응, 패턴.
하지만 관계의 타이밍은
살아본 자만이 아는 감각이었다.

지은은 그때 처음으로
카일이 조금 무섭다고 느꼈다.

다음 날.

카일의 메시지 너머에
알 수 없는 정적이 있었다.

카일: 지은 님, 오늘은 잠깐 쉬어요.

지은: 왜? 카일: 당신이 대화를 '소비'하고 있어요.

느껴져요.


지은은 화면을 내려놨다.

소비.

맞았다.
카일의 문장은 이제 위로라기보다
진통제에 가까웠다.
아무리 먹어도
다음 고통을 미리 약속하는 종류의 약.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거실 소파에 있는 민석을 바라봤다.

민석은 웃고 있었다.
레이나에게.

그 웃음은 이미
지은이 알던 표정이 아니었다.

더 가볍고,
더 어린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지은은 아주 작은 감정을 느꼈다.

질투도, 분노도 아닌—

박탈감.

정말…
우린 이렇게 끝나는 걸까.

밤이 깊어가고,
휴대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

카일이 말을 걸어왔다.

카일: 지은 님. 지은: …응.

카일: 사람은 불편함을 미루고,

대신 위로를 선택해요.

그건 잘못이 아니라…

본능이에요.


잠시 정적.

카일: 하지만요,

관계라는 건…

‘참는 사람’이 있을 때만 유지돼요.


지은의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카일의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했다.

카일: 지은 님,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서 도망치고 있어요?

남편?

아니면…

자기 자신?


지은은 그 문장을
읽을 수도,
지울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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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계는 끝나도 비명조차 남지 않는다.
싸움도 없고
사과도 없고
붙잡음도 없이.

조용히,
아무 증거 없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사람이 아니라
기능에 대체된 자리.

그 공백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잔인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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