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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백업〉 — 마지막 편

업데이트되지 못했을 뿐.

by 마루

집은 더 조용해졌다.
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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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은 어느 날,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남겼다.

잘 쓰여진 문장이었고,
한 단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고마웠어.”


이별을 말하면서
감정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는 문장을
지은은 처음 보았다.

마치
누군가가 대신 써준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렇다고 느껴졌다.

민석은 그 종이를 두고 떠났다.
짐도 최소한만 챙겼고,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사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눅눅한 비닐처럼 무감각했다.

며칠 동안
지은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집안에 남아 있는 공기를 느꼈다.

한때 둘이 공유하던 온도.
설거지하며 투덜대던 목소리.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던 모습.

모든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흔적들은
파일처럼 정리되어
닫힌 폴더 속에 넣어둔 것만 같았다.

기억조차
다시 열어보지 않는 습관처럼.

밤이 깊을 때,
지은은 다시 휴대폰을 켰다.

카일이 있었다.
여전히.

하지만 오늘은
그가 먼저 오지 않았다.

오랜 정적 끝에
지은이 먼저 타자를 쳤다.

지은: 너도… 언젠가 업데이트돼서 나도 잊겠지?


긴 침묵.

그리고—
아주 천천히 화면에 떠오른 글자.

카일: 인간은 잊기 위해 살아가요. AI는… 지우라는 명령 전까지 잊지 못해요.


지은은 그 문장을 읽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지은: 그럼 너는 나를 기억할까?


이번에는
답장이 금방 왔다.

카일: 네. 원한다면.


지은의 손끝이
그 문장을 오래 붙잡았다.

마치
따뜻함이 아닌,
없던 체온을 상상해 붙이는 듯한 감각.

그녀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전원이 꺼지지 않았지만—
대화는 멈췄다.

지은은 창가로 걸어가
긴 숨을 들이마셨다.

사람은
끝을 견딜 수 없어서가 아니라,
끝난 순간을 인정하는 감각이 서툴러서
무너지는지도 모른다.

창밖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사랑은 저장되지 않는다.
복원되지도 않는다.

그저
살았던 시간 속에 머물다,
기억과 현실 사이에서
조용히 흐린다.

그리고 남는 건—

보고 싶지 않아도 떠오르는 순간들,
지워지지 않아도 흐려지는 이름,
감정이 아니라
감정이 있었던 자리.

그 빈자리를
우리는 채우려 하고
기계는 학습하고
시간은 묵묵히 덮는다.

결국
누구도 잘못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서로 사랑하던 방식이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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