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키혼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술 이야기 3화] 밟아야 깊어지고, 눌러야 넘친다
유후인의 어느 저녁, 노란 조명 아래 놓인 작은 술잔(종기) 위로 황금빛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일본 특유의 환대인 '모리코보시'. 잔을 넘쳐 아래 받침까지 찰랑찰랑 차오르는 그 술을 보며 나는 대박을 맞은 듯한 희열과 동시에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코끝을 찌르는 진한 오크 향과 구수한 보리 내음 사이로, 수십 년 전 원주의 어느 보리밭 풍경이 불쑥 끼어든 것이다.
하교 길, 발에 착 붙지 않아 질컹거리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나는 보리밭을 누볐다. 어른들은 보리 싹이 올라오기 무섭게 아이들을 밭으로 내몰았다. 이유도 모른 채, 혹은 그저 심술궂은 장난기였을지도 모를 발짓으로 나는 파릇한 보리 싹들을 잔인하게 꾹꾹 눌러 밟았다. 밟아야 뿌리가 깊어지고, 모진 겨울바람을 견뎌 속이 꽉 찬 보리가 된다는 역설을 어린 소년이 알 리 없었다. 그저 밟히는 보리에게 애먼 화풀이를 하던 기억뿐이다.
그렇게 밟혔던 보리가 세월이라는 오크통 속에 갇혀 수십 년을 견디더니, 이제는 199,000원이라는 숫자표를 달고 내 앞의 잔을 넘쳐흐르고 있다. 유후인의 술잔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라, 밟히고 눌린 시간을 견뎌낸 보리의 '결실'이었다.
원주의 보릿고개 식당에서 보리밥 한 숟가락을 뜨며 이 술을 다시 생각한다. 그때 내가 밟았던 것은 보리가 아니라, 어쩌면 나중에 마주할 이 찬란한 향기의 밑거름이었을지도 모른다. 눌러야 채워지고, 밟혀야 비로소 깊어지는 법. 인생도, 사진도, 그리고 이 한 잔의 보리술도 결국 시간의 무게를 얼마나 잘 견뎠느냐의 문제였다.
### 작가의 말
**"기억은 때로 술잔의 경계를 넘어 흐른다."**
유후인에서 만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름 그대로 나의 유년기를 소환했습니다. 잔을 넘치던 그 술의 향기는 보리밭을 짓밟던 소년의 고무신 소리와 중첩(Gyeo-chim)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밟히고 눌리는 고통의 시간조차 결국은 누군가에게 대박 같은 환대의 향기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 오늘 마주한 보리밥 한 그릇과 보리 소주 한 잔이 저에게 건넨 위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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