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만 쉬었을 뿐인데, 성적이 불타올랐다”
단어들의 무대
“딸깍.”
어디서 난 소리인지 몰랐다. 눈은 감겨 있었고, 귀도 반쯤 잠겨 있었는데—확실히 뭔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훈은 명상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어제와 달랐다. 이번엔, 뇌 속에 조명이 켜졌다.
커튼이 열렸다. 아니, 정말로. 진짜로 커튼. 빨간 벨벳 같은 게 좌우로 스르륵 갈라졌다. 그 뒤엔 무대. 그리고 무대 위에는—‘단어들’이 서 있었다.
첫 번째 등장한 건 '은유'였다. 검은 턱시도, 반짝이는 구두, 스냅핑 핑거.
“Ladies and gentlemen, 나는 말이 아니라 감정이다.”
그는 한 손으로 마이크를 돌리며 말했다.
“나는 빗대는 사람. 나는 숨기는 말. 나는 의미의 그림자.”
그 다음, 직유가 등장했다.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 풍선을 들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입에서 말이 흘렀다.
“~처럼.”“~같이.”“~마냥.”“...비슷한데, 난 그 애랑 달라.”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난 솔직한 애야.난 ‘비슷한’ 척을 진짜로 해.”
그리고, '부사'가 힙합 비트에 맞춰 튀어나왔다. 모자 푹 눌러쓰고, 후드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무대를 걷다가 갑자기 돌면서 외쳤다.
“빠르게!격렬하게!절대적으로!약간 뜬금없게!”
그의 말 하나하나가 문장의 리듬이었고, 지훈의 뇌 안에 잔상이 남았다. 무대 위 단어들은 자기소개가 끝나면 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훈의 의자 주위를 돌며 속삭이듯 말했다.
은유:
“난 마음속에서 조용히 울리는 소리야.어차피 진짜 말은,입 밖으로 잘 안 나오는 법이잖아.”
직유:
“난 너랑 닮았어.직접 말 못 하고, 자꾸 뭔가 ‘같이’ 말하잖아.”
부사:
“형, 공부는 그냥 무작정 하는 게 아님.적당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진지하게—알겠지?”
지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뭐지? 지금 내가 ‘말들’한테 말 걸림 당하는 중인 거야? 근데 그 말들이 이상하게 이해가 갔다. 그리고 기억이 됐다. 그는 눈을 떴다. 책도 없고, 펜도 없고, 암기도 없었지만—지금 머릿속에는, 단어들이 앉아 있었다. 표정도 있고, 말투도 있는, 완벽한 기억의 캐릭터들.
“외우는 게 아니라, 무대를 본 거다.”
지훈은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이건 좀…쇼다. 공부 쇼.”
교과서 랩이 된다
《열반책방》은 오늘도 똑같은 조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책 냄새, 나무 냄새, 그리고 뭔가 이제는 익숙한 이상함. 지훈은 눈을 감았고, 도사님은 뜬금없이 말했다.
“이제, 외우는 게 아니라 흘러야 해.”
지훈은 눈을 떴다.
“...뭐가요?”
“물처럼?”“소화처럼?”“눈물처럼?”
도사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무런 기계도 없는데, 음악을 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유는 ‘처럼’으로 느껴져,문장의 끝에서 스며들어~의미의 옷을 입혀줘,나도 모르게 머리에 심어져~”
지훈은 멍했다.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그 전에 박자가 들어왔다. 그 리듬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그 순간, 지훈의 머릿속 교과서 문장들이 리듬으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은유는 직접 말 안 해,대신 빗대는 천재야~별을 사랑이라 부르면,그게 바로 은유의 플레이야~”
“부사는 느낌의 속도계,문장을 빛처럼 바꿔줘~‘빠르게, 격렬하게’ 말하면,그건 부사의 주특기~”
지훈은 속으로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같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펴지 않았다. 그런데, 단어 다섯 개가 머릿속에서 박자를 타며 줄줄이 떠올랐다.
‘직유, 은유, 부사, 반어, 강조법.’
심지어 설명도 따라왔다. 지훈은 랩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뛰었다.암기해서가 아니었다. 뇌가,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거 진짜 되는 거잖아.”
그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도사님은 마치 들은 듯, 그냥 찻잔을 밀어주었다.
지훈은 랩을 흥얼거리며 말했다.
“오늘 공부… 흘렀네요.”
꿈과 이어지는 기억
지훈은 평소처럼 눕지 않았다. 그는 ‘뉘었다’. 자기 자신을, 오늘 하루의 기억들을, 심지어 단어 몇 개까지 침대에 눕혀놨다.
“오늘은 조금… 재밌었다.”
그건 거의 처음 해보는 말이었다. ‘공부’와 ‘재미’가 같은 문장 안에 들어가는 일은 지훈의 어휘력 기준으로도, 불법 합성이었다.
잠이 들었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속삭임도 없이, 그냥—푹.
그리고, 무대가 다시 열렸다. 진짜 무대. 지훈의 뇌 한가운데, 커튼이 열리고 조명이 켜졌다. 이번엔 관객석이 있었다. 관객은 단 하나. 지훈.
그는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관객이자 연기자이자 기억의 주인으로.
먼저 등장한 건, 직유였다. 풍선을 들고 나와 말했다.
“너, 나랑 춤췄었잖아.”“그 기억, 네 손에 묻었어.”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꿈이니까 말은 되는데, 감정이 더 말이 되게 하고 있었다.
다음은 부사. 이번엔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형, 난 네 리듬에서 태어난 단어야.”“넌 나를 외운 게 아니라, 흘렸지.”
“흘렸다.”그 단어는 이상하게 뇌 깊은 데에서 찌릿하고 울렸다. 심장이 아니라 기억에 닿는 단어.
그다음, 은유가 걸어나왔다. 이번엔 좀… 멋있었다. 정장 대신 한복을 입고, 무대 중앙에 선 그는 무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넌 나를 빗댔고, 난 너를 이해했다.”
그 말은 시 같았고, 지훈은 시를 외운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 말이 어떤 수식보다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는 무대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어들이 자기를 외우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은 꺼졌다. 빛도 사라지고, 커튼도 닫혔다. 단어들은 퇴장했고, 지훈은 다시 그냥 지훈이 되었다.
아침. 눈을 떴을 때—그는 뭔가가 꽤 많이 남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직유, 은유, 부사, 반어, 강조, 점층, 역설, 대조, 반복…’
열 개. 딱 열 개의 단어가 머릿속에서 툭툭툭툭— 하고 소리도 없이 깔려 있었다.
지훈은 말없이 속으로 말했다.
“이건… 진짜다.”
수업 시간, 기억의 리듬이 튀어나오다
4교시. 국어 시간. 지훈의 생체리듬 기준으로는 **‘눈꺼풀 무게가 자꾸 늘어나는 시점’이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무심하게 분필을 툭툭 부딪히며 말했다.
“자, 그럼 여기 나오는 표현법을 말해볼 사람?”
지훈은 원래 이런 질문이 나올 때 공기처럼 존재하는 특기생이었다. 투명함. 무반응. 무표정. 무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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