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에서 찍은 한 장
《사진관에서 찍은 한 장》
사진관은 골목 끝, 오래된 세탁소 옆에 붙어 있었다. 작은 간판은 바래 있었고, 창 안에는 누렇게 빛바랜 액자가 서너 개 걸려 있었다. 가족사진, 환갑잔치, 졸업식.모두 웃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 없을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박정우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에는 묵은 화학약 냄새가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카 메라 옆 조명등 아래, 낡은 천 배경이 주름진 채 늘어져 있었다.
“사진 한 장, 찍고 싶습니다.”
사진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박정우는 초롱이를 품에 안고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초롱이는 눈을 거의 감고 있었지만, 그의 품속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플래시가 터졌다. 찰칵— 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그 순간 박정우는 눈을 감았다. 그는 단지, 남기고 싶었다. 말로는 전하지 못한 시간,이 작은 생명이 자신에게 주고 간 모든 계절을.
며칠 뒤, 작은 봉투가 도착했다.그 속에는 흑백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배경은 흐릿했고, 그림자엔 결이 있었다. 박정우는 말없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앉아 있었고, 초롱이는 그의 품속에서 잠들 듯 기대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한 장에 전부가 담겨 있었다.
사진 뒷면, 그는 한 줄을 적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봄날의 얼굴.”
《작은 여행》
이른 여름이었다. 공기는 이미 조금 따뜻해졌지만, 바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박정우는 소형 버스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창가 자리. 바구니 안에는 초롱이가 조용히 몸을 말고 있었다. 출발하는 진동에 살짝 움찔했지만, 곧 그의 손등에 턱을 얹었다.
"조금만 있으면 도착한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다정했다.
한 시간쯤 지나 버스는 바닷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박정우는 천천히 바구니를 품에 안고 내렸다.
바다는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하얀 모래사장이 바람에 반짝였고, 파도는 조용히 숨을 토해내듯 밀려왔다.
박정우는 모래밭 한켠에 돗자리를 깔았다. 그리고 바구니 속 초롱이를 조심스레 꺼냈다.
"봐라, 초롱아. 바다다."
초롱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소금기 섞인 바람 냄새를 맡으며 코를 실룩거렸다. 짧은 다리가 조심스럽게 모래 위를 딛었다. 얼굴에는 낯선 호기심과 조심스러운 기쁨이 섞여 있었다.
잠시 후, 초롱이는 작게 꼬리를 흔들며 바닷가 쪽으로 한두 걸음 나아갔다. 파도 소리에 깜짝 놀라 뒷발을 움찔했지만, 이내 다시 앞으로 다가섰다.
박정우는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이렇게도 활기찬 모습을 아직 볼 수 있구나.’
가슴 안쪽에서 천천히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잠시 후 초롱이는 뛰어왔다.짧은 다리로 모래 위를 바삐 달려 그의 품에 안겼다.
박정우는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잘 놀았다."
초롱이는 숨을 고르며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었다. 짧고 고른 숨결이 옷깃을 적셨다.
오후가 깊어갈 무렵, 노을빛이 바닷가를 붉게 물들였다. 박정우는 작은 도시락을 열어 삶은 닭고기를 초롱이 앞에 내려놓았다. 초롱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먹기 시작했다.
그는 초롱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이 세상은 이렇게 넓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덧 해가 바다 끝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잔잔한 파도 위로 마지막 햇살이 흔들렸다.
그들은 조용히,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 시간은 고요히 흘렀고, 그 하루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어느 봄날, 작은 대화》
그날 아침, 햇빛은 나뭇가지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박정우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속도는 느렸고, 발끝은 조심스러웠다. 그의 옆에는 초롱이가 발맞춰 걷고 있었다.아주 작은 발자국들이 그의 그림자 안에 겹쳐졌다.
공원 입구 근처, 오래된 벤치 앞을 지날 무렵이었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나오셨네요. 그 강아지랑.”
박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붉은 모자를 눌러쓴 할머니가 있었다. 검은 봉지를 하나 들고, 철봉 옆 바위에 앉아 있었다.
초롱이는 조용히 그의 다리 옆에 앉았다.
“처음 봤을 땐 낯설더니…이젠 눈에 익어요. 둘이 꼭 오래된 부부처럼 보여요.”
박정우는 작게 웃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할머니는 바위 옆 풀을 뜯었다. “내가 키우던 개도 저만 했어요.비 오던 날, 도망 나가서…끝내 못 찾았죠.”
박정우는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 초롱이는 그 옆에 등을 붙인 채 앉아 있었다.
“이젠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기다릴 것도 없는데…”할머니는 봉지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아침에 나오는 건,누가 이렇게 같이 걷는 걸 보면 마음이 좀 덜 아픈 것 같아서 그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햇빛은 나무 그림자 사이로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초롱이가 작게 코를 벌름거리며 박정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릎을 굽혀 조용히 그 아이를 안아 올렸다.
할머니가 말했다.
“잘 어울려요.같이 걷는 모습 보면…뭐랄까, 사람 사는 느낌이 나서 좋아요.”
박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초롱이를 품에 안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바람이 불지 않았고, 그림자는 그대로였다. 햇빛만이 작게, 아주 작게 흔들렸다.
《생활비 계산과 불안의 시작》
그 달의 연금이 입금된 날이었다. 박정우는 조용히 우체통에서 고지서 봉투들을 꺼냈다. 전기요금, 가스요금, 건강보험료, 관리비.
작은 식탁 위에 서류들을 나란히 펼쳐놓았다. 오래된 계산기를 옆에 두고, 수첩을 펼쳤다.
수입: 87만 원.
그 아래로 지출 항목들이 줄을 이루었다.
공과금: 23만 원.보험료: 7만 원.약값: 9만 원.사료: 12만 원…
숫자들이 조용히 내려갔다.남는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수첩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다음달엔 병원비가 또 들어갈 텐데.’
짧게 떠오른 생각이 식탁 위 공기 속에 가라앉았다. 그는 계산기 위에 손을 얹었다가 이내 거뒀다.
초롱이는 그의 발밑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무릎에 기대고 조용히 숨을 쉬었다. 그 작은 체온이 다리를 덥혔다.
박정우는 잠시 초롱이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하고 따뜻한 눈빛. 어느새 너무 익숙해진 눈빛이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 서랍을 열었다. 맨 아래 서랍 속에 작은 보석함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전 아내가 남긴 금반지가 한 개 놓여 있었다. 얇고 빛이 거의 사라진 금반지. 손끝으로 금속의 표면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아직은 아니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금반지를 다시 보석함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
부엌에서 커피포트를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초롱이는 이불 위로 올라가 몸을 말았다.
박정우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커피잔을 들었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천천히 공기 속으로 퍼져갔다.
잠시 후,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다음달까진… 괜찮겠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