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마음·명상을 잇는 21세기 치유학.1
1-1. 위기의 시대, 한 사람의 시선 – 허준과 조선의 병들
1-2. 몸과 우주를 한 권에 담다 – 동의보감이라는 프로젝트
1-3. 병명이 아니라 삶의 방식 – ‘사람을 살리는 책’의 철학
동의보감의 첫 장을 펼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 책이 태어난 시대의 공기를 한 번 들이마셔야 합니다.
16세기 말, 조선은 오래된 노인처럼 숨이 가빴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나라 전체를 쓸어 지나갔고,
마을과 논밭은 불타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평화가 찾아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남겨진 것은
굶주림,
추위와 전염병,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깊은 상실감이었습니다.
나라 전체를 하나의 몸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그때의 조선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피는 이미 많이 흘려 버렸고,
뼈는 부러진 곳이 많고,
장기들은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왕이 있는 궁궐에서부터 산골 작은 마을까지,
“아픔”은 어느 한 곳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굶주림과 전염병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약 한 첩 살 돈이 없어
그저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의사는
단지 환자 한 명의 병만 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라라는 거대한 몸의 병세를
날마다 피부로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허준은 바로 그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허준은 “왕의 어의(御醫)”입니다.
조선 최고의 의관, 왕 곁에서 임금을 돌보던 사람.
하지만 그의 시작은 눈부시지 않았습니다.
서얼 출신,
지위와 집안만 보자면
한 나라의 의료를 책임질 자리와는 거리가 먼 위치였습니다.
허준은 젊은 시절부터
몸과 병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으로 살아 있던 사람입니다.
스승 유의태에게서 배웠다는 설화 섞인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백성들 사이를 돌며 병을 살피는 의관”**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전쟁과 기근의 시대,
허준이 마주한 풍경은 대개 비슷했습니다.
병을 앓다 이미 숨이 멎은 아이의 찬 손,
자식 둘을 묻고도 눈물을 다 써버린 어머니의 마른 얼굴,
약값을 깎아 달라며 쌀 한 줌을 내미는 농부의 떨리는 손.
임금의 맥을 짚는 순간에도
허준의 머릿속에는
궁궐 담장 밖,
이름 모를 사람들의 얼굴이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왕을 살리는 일과
백성을 살리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지만,
허준에게 둘은
완전히 다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임금을 살리는 것은 나라의 기둥을 세우는 일이고,
백성을 살리는 것은 나라의 살과 피를 지키는 일이다.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오늘 한 사람의 병을 고쳐도,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은 내일 또 쏟아져 들어온다.”
한 사람의 병만을 보던 눈이,
점점 한 시대의 병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 날, 허준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이 비슷한 병이,
왜 이 비슷한 고통이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는가?”
어떤 이는 전염병으로 쓰러집니다.
어떤 이는 굶주림 끝에 면역이 무너져 병을 얻습니다.
어떤 이는 과도한 노동과 스트레스로
온몸의 기운이 말라버린 채 쓰러집니다.
겉으로 드러난 병명은 다를지 몰라도,
그 뿌리에는
빈곤,
열악한 위생,
무너진 생활 리듬,
자연과의 불화,
라는 공통된 토양이 깔려 있었습니다.
허준의 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병이
**“삶의 방식이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결과”**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의사 한 사람이 평생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왕과 귀족을 살리는 것만으로는 시대의 병을 막을 수 없다.
“누구나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지침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허준은 칼과 침, 약탕기만으로는
도저히 다 고칠 수 없었던 시대의 병을,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 책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의보감입니다.
동의보감은 그래서
처음부터 “병을 나열한 책”이 아니라,
“이렇게 살면 덜 아프다,
이렇게 먹고, 이렇게 쉬고, 이렇게 마음을 돌보면
병이 조금은 멀어질 수 있다.”
라는 삶의 사용설명서에 가까운 책이었습니다.
허준이 보았던 조선의 병은
오늘의 우리와도 멀지 않습니다.
전쟁 대신 끝없는 경쟁과 과로,
기근 대신 시간과 여유의 부족,
전염병 대신 우울·불안·번아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파고듭니다.
허준이 서 있던 그 자리에서
그가 나라를 하나의 몸으로 바라보며
“사람을 살리는 책”을 꿈꾸었다면,
이제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하나의 우주로 바라보며
**“현대인을 위한 동의보감”**을 다시 쓰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장에서,
그가 남긴 이 거대한 책이
어떤 구조와 사상으로 짜여 있는지,
어떻게 한 사람의 몸과 우주를
한 권 안에 담아내려 했는지
천천히 펼쳐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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