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2년 4월 20일 이후, 류현수 박사의 연구 기록은 그날 이후로 멈춰 버렸다.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시계의 핵심 부품이 갑자기 멈춰버린 듯, 시간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지만 세린의 내면은 거대한 공백을 향해 허우적댔다. 그녀의 붉은색 스포츠카는 첨단 자율주행 시스템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아스팔트를 삼키듯 질주하고 있었다. 차체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가 흡사 거대한 야수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지만, 그녀의 의식은 오직 대시보드에 고정된 홀로그램 태블릿에 박혀 있었다.
투명한 화면 위에는 '2032년 5월'로 명명된 암호화된 파일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마치 자신을 조롱하듯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빛나는 시 한 구절이 그녀의 뇌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도 따뜻한 것이 있다.’
일주일. 정확히 7일 밤낮을 그녀는 이 짧은 문장 하나에 매달렸다. 류현수 박사가 남긴 모든 암호 중 유일하게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이 구절이 장석남 시인의 '햇빛 천장' 일부라는 것은 첫날 알아챘다. 그러나 그 이상의 단서는 없었다. 논리적인 실마리도, 감성적인 빛의 징후도. 아무것도.
그녀는 기억했다. 어린 시절, 냉장고 문에 붙어 있던 아빠의 문제들을. 미적분 공식, 물리학 난제, 심지어는 기상천외한 추리 퍼즐까지. 아빠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그런 암호들을 남겼고, 세린은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아 그것들을 해독했다. 풀이 과정을 설명할 때마다 아빠의 얼굴에 번지던 경탄의 미소.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보상이자 존재의 증명이었다. 단 한 번도 풀지 못한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하지만 이건 달랐다. '따뜻한 것'이라는 모호한 말은 모든 것을 논리로 파악하려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도무지 정의되지 않았다. 명확한 지향점이 없는 언어의 나열은 그저 무의미한 소음일 뿐이었다. 그녀는 이 태블릿 안에 아버지의 마지막 연구, 그리고 그의 죽음에 얽힌 끔찍한 진실이 봉인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첨단 보안 기술도, 비범한 지성도, 이 몇 줄의 시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자신의 지성이 이토록 무력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태블릿을 쥔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고속도로를 맹렬히 달리던 붉은 스포츠카는 어느새 길을 틀어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문명이 퇴색한 듯한 풍경 위로 짙은 먹구름이 불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류세린의 시선은 여전히 태블릿에 고정된 채, 마침내 자신의 지성이 출구 없는 막다른 길에 갇혀 버렸음을 깨달았다.
바로 그 시각, 이질적인 공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지옥 같은 곳에서 또 다른 진실의 조각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안은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교도소 마당 구석, 가장 깊숙한 그늘에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폐쇄회로 카메라조차 미치지 못할 법한 음습한 공간. 그의 뇌리에는 오직 한 가지 기억만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대리비의 열 배.' 그 달콤한 제안. 모든 것이 거기에 멈춰 있었다. 차량 내부에서 피어오르던 희뿌연 연기, 코끝을 찌르던 매캐한 화학약품 냄새, 그리고 이내 기억마저 뿌옇게 지워버린 방독면의 사내들. 이 모든 정교한 연극의 연출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대리를 부르며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바로 그 남자. 이안의 심장은 거대한 짐승처럼 울렁였다. 이 모든 게 치밀한 계략임에 틀림없었다. 그 남자를 찾아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나가 그 가면을 벗겨내야만 했다.
바로 그때, 마당을 가로질러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교도소 내에서 힘깨나 쓴다는 재소자들을 이끄는 독사였다. 시멘트 바닥을 짓누르는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이안이 숨어 있던 그늘까지 닿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목에 새겨진 똬리 튼 뱀 문신이 독기 서린 위압감을 뿜어냈다. 독사의 거구는 흡사 거대한 회색 돌덩이 같았다. 그 뒤를 따르는 세 명의 재소자들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이안의 숨통을 조여왔다.
"어이, 예수님. 쥐새끼처럼 여기 숨어서 뭐 하시나? 얼른 불쌍한 중생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파해야지."
독사는 거들먹거리며 이안의 은신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는 교도소의 딱딱한 공기를 찢고 날아오는 조롱의 비수였다. 이안은 덩치에서 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본능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동자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차오르는 공포 사이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안은 독사의 시선을 고요히 마주했다.
"시비를 거는 거라면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교도관을 부르기 전에 비키세요."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속에는 타협할 수 없는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미세하게 떨렸으나 결코 꺾이지 않는 단호함. 하지만 이는 독사에게 불쾌한 도전으로 다가갔다. 독사는 이안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거대한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단숨에 들어 올렸다. 힘이 잔뜩 들어간 독사의 손아귀가 살점을 파고들었고, 이안의 숨통은 그대로 조여들었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안의 발이 바닥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는 독사의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 마당 한복판에 팽개쳐졌다. 쿵! 등부터 떨어지는 충격에 폐부 깊숙이 고통이 밀려왔다.
"이런 비실비실한 새끼가 사람을 죽였다고? 어이가 없군. 이곳에서는 내가 법이야. 시체로 실려 나가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내 발바닥이나 핥으며 조용히 지내. 알겠어?"
독사의 목소리는 경고이자 사형 선고였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다. 이안은 허망하게 뱉어진 그 말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체로 실려 나가고 싶지 않으면.' 그 문장이, 바로 그 밤 자신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넣었던 자의 얼굴과 섬광처럼 겹쳐졌다. 이곳에서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최소한, 복수하기 전까지는.
이안은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뇌리에는 아득한 과거의 기억들이 번개처럼 스쳤다.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살기 위해 내려갔던 시골마을. 중학교 시절, 텃세 심한 시골 아이들, 소위 '일진'들에게 매 쉬는 시간마다 당해야 했던 지독한 시달림. 그는 물리적인 힘 대신, 끈질긴 인내와 순간적인 기지로 버텨냈다. 굴복하지 않는 자신만의 생존 방식이 그의 핏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독사의 압도적인 덩치 앞에서도, 이안의 눈빛은 일순간 맹수의 공격에서 벗어나려는 하이에나처럼 처절한 광기로 번뜩였다.
"내 명줄 끊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깡촌 바닥에서 이빨 악물고 온갖 풍파 다 겪은 나야. 너 따위에 내가 무릎 꿇을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어. 네놈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디 한번 끝까지 해봐."
독사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짧게 코웃음 쳤다. 녀석의 육중한 팔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독사의 주먹이 이안의 턱을 후려쳤다. 머리가 옆으로 꺾이고 시야가 순간 비틀렸다. 이안은 그대로 휘청이며 뒤로 나자빠져 딱딱한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몸의 고통보다 더한 분노가 그의 뇌를 지배했다.
찢어질 듯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이안은 숨을 헐떡이며 또다시 독사에게 달려들었다. 독사는 얄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맞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쇠망치처럼, 녀석의 육중한 주먹이 다시 한번 이안의 복부를 강타했다. 위액이 역류하는 고통과 함께 이안은 그대로 튕겨나가 벽에 부딪혔다. 포기할 리 없었다. 마치 태엽 감긴 인형처럼, 그는 깨진 몸을 일으켜 세우며 숨을 헐떡였다. 그의 모습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불의에 대한 처절한 저항 그 자체였다.
독사는 흥미롭다는 듯 씩 웃었다. 그의 패거리들이 이안을 향해 달려들려 하자, 독사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마치 맛있는 특식을 홀로 즐기기라도 하려는 듯, 독사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진 이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질질 끌어 일으켜 세웠다. 고통에 눈을 질끈 감는 이안의 얼굴을 독사는 자신의 눈높이까지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독사가 이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안은 잔뜩 웅크렸던 몸에 순간적인 힘을 실었다. 그의 시선은 독사의 이마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하이에나가 마지막 발버둥을 치듯, 온몸을 던져 독사의 이마에 머리를 박았다. 둔탁한 충격음이 교도소 마당에 울려 퍼졌다.
"으아악!"
예상치 못한 박치기에 독사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독사는 본능적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던 손을 놓고, 피가 솟구치는 눈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찢어진 상처 사이로 붉은 피가 스며 나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패거리들은 일순간 경악했다. 그러나 이내 독사의 분노 서린 외침이 교도소 마당을 찢었다.
"피… 감히 이 독사의 얼굴에 흠집을 내?! 어디 이번에도 뒈졌다 깨어나는지 보자, 이 개자식아!"
분노에 휩싸인 독사는 휘청이는 몸을 바로잡고 이를 갈았다. 패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쓰러진 이안을 에워쌌다. 차가운 교도소 마당에서, 무자비한 폭력이 이안의 몸을 사정없이 짓밟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둔탁한 충격음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쉽게 꺾이지 않는 삶을 살아온 그였지만, 이안의 몸은 물리적인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팔로 머리를 보호하고 몸을 웅크린 채 최대한 충격을 줄이려 애썼다. 그의 저항은 이미 시작되었고, 굴복이란 없었다.
"삐이-익!"
멀리서 교도관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교도소 마당을 갈랐다. 발소리가 가까워오자 패거리들은 피투성이가 된 독사를 부축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피로 얼룩진 바닥에는 이안 홀로 버려졌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이제 이안은 독사 패거리의 명확한 표적이 되고 말았다. 흙먼지 묻은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다시 자신만의 쉼터인 그늘로 숨어들려는 이안을 교도관이 불러 세웠다. 그의 표정은 마치 예정에도 없는 귀찮은 일을 떠맡은 듯, 불만과 지루함이 섞여 있었다.
"4020, 면회다.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