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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쟁 구도 변화와 한국의 길

3부 AI 시대 세상의 판이 바뀐다. 8. 글로벌 경쟁 구도 변화

by 신피질

AI 시대의 세상은 이미 판이 바뀌었다. 데이터는 새로운 석유가 되었고, 반도체는 전쟁터의 무기처럼 다뤄지고 있다. 기술은 더 이상 산업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주권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다.
미국과 중국, 유럽은 각자의 철학과 방식으로 이 거대한 변화를 설계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 한국은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기술 질서의 설계자다. 오픈 AI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엔비디아가 만들어낸 AI 생태계는 하나의 제국처럼 움직인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클라우드를 하나로 엮어 거대한 인프라를 만들고, 거기에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의 가치를 결합시켰다.
미국은 CHIPS Act와 IRA를 통해 AI를 ‘경제 안보’의 중심축으로 끌어들였고, 첨단 반도체 생산까지 자국 내로 회귀시키려 한다.
그 결과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기술 동맹이자, 동시에 안보적 의무의 틀 안에 갇힌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다.

중국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AI를 시장이 아닌 통치의 도구로 보고, 사회의 신경망으로 통합한다.
대표적으로 바이두의 ‘문심일언(ERNIE Bot)’과 텐센트의 ‘혼원대모델(Hunyuan Model)’은 중국판 ChatGPT라 불리는 대규모 언어모델로, 국가의 데이터와 검색·메신저 생태계에 결합되어 있다.
여기에 로봇 산업과 자율주행 기술까지 더해지면서, 중국은 이미 AI를 행정·산업·국가 통치 전반의 운영 체계로 끌어올리고 있다.


딥시크(DeepSeek)와 같은 연구형 모델은 미국의 연구소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로봇 산업 역시 AI 기술과 융합되어 빠르게 고도화되고 있다. 거대한 인구와 산업 규모, 그리고 정부의 강력한 조정력이 결합된 중국식 모델은 민주주의의 속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유럽은 세 번째 길을 택했다. 유럽연합은 기술 경쟁보다 인간의 존엄과 윤리를 우선시한다.
EU AI Act와 일반개인정보보호법 GDPR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새로운 표준의 수출이다.
유럽은 ‘신뢰할 수 있는 AI’를 브랜드로 삼아 기술보다는 제도와 규범의 패권을 지향한다.


미국이 기술의 언어로 세계를 이끌고, 중국이 통제의 언어로 질서를 만든다면, 유럽은 윤리의 언어로 미래를 정의하려 한다.

이 세 나라의 전략을 엮는 실질적인 전장은 반도체 공급망이다. 반도체는 AI를 가능하게 하는 피와 근육이다.
미국은 설계와 생태계에 강하고, 한국과 대만은 제조에 강하며, 유럽은 노광 장비와 핵심 기술을 장악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AI 반도체가 세계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지만, 그 칩을 생산하는 곳은 미국이 아니라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이다. 바로 이 지점이 미국이 제조업을 자국으로 되돌리려는 이유다. 반도체와 AI 인프라를 안보의 범주로 끌어들이며, 한국과 대만의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미국 내부로 이전시키려 한다.


한국에게 이는 협력인 동시에 위기다.
설계와 파운드리, LSI 같은 고부가가치 영역은 여전히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한국은 메모리 중심의 구조 속에서 점점 좁은 틀에 갇히고 있다.

AI 반도체 시대는 단순히 빠른 칩의 경쟁이 아니다. GPU, 메모리, 전력, 냉각, 클라우드, 데이터센터까지 이어지는 하드웨어 전체의 생태전이다. 미국은 이미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전 세계에 확장하며 AI 연산력의 절대 우위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 역시 통신망과 전력 효율, 재생에너지 기술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투자 규모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미국의 빅테크들이 수백조 원 규모의 자본으로 ‘승자독식’ 구조를 강화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규모 민간 투자와 단절된 정책 속에서 속도와 규모 모두 밀리고 있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AI 인프라의 하드웨어 경쟁에서 계속 뒤쫓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판을 바꿀 것인가.


한국의 길은 단순한 기술 추격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사회 시스템을 재설계하는 전략적 국가 모델을 만드는 데 있다. 한국은 이미 국민건강보험, 전자정부, 초고속 네트워크 등에서 세계가 인정하는 시스템적 성취를 이뤄냈다. 이 구조적 역량을 AI와 결합시킨다면, 한국은 기술을 넘어서 AI로 사회를 운영하는 국가, 즉 ‘운영 철학을 수출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AI 시대의 세계는 더 이상 자유무역과 분업의 질서로 움직이지 않는다. WTO 체제 아래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국가의 직접 개입이 이제는 주요한 경쟁 수단이 되었다. 미국과 중국, 유럽은 모두 AI와 반도체를 중심으로 정부 주도형 전략으로 전환했다. 이제 세계 경제는 규범의 시대를 넘어 총력전의 시대로 들어섰다.

한국은 이 전환의 한가운데에 있다. 과거 한국의 산업 구조는 수출과 민간 효율성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게임의 룰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술, 안보, 인프라가 결합된 국가 주도형 경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시장의 자율에만 의존하는 전략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부-민간 협력형 AI 국가 전략을 세워야 한다. 정부는 규제자가 아니라 전략가로 변해야 하고, 민간은 수동적 피보호자가 아니라 동등한 실행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AI는 모든 산업의 공통 기반이기에, 국가 전체가 방향과 목표를 공유하지 않으면 개별 기업의 성취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 한국은 AI 산업 정책의 철학과 실행을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 철학은 인간 중심, 사회 신뢰, 공공성의 가치 위에 세워져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방향성이 명확해야 한다. 실행은 그 철학을 구체적 제도로 옮기는 일이다. 반도체, 데이터센터, 에너지, 교육, 지방 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AI 산업을 단순한 혁신 담론이 아니라 국가의 ‘작동 시스템’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AI 반도체 생태계의 재편이다. 한국은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지만, 설계와 파운드리,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여전히 취약하다. 미국과 중국이 모두 AI 칩 자립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메모리 단일 구조는 위험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로직-메모리 통합, 뇌처럼 작동하는 반도체인 뉴로모픽(Neuromorphic), AI 반도체 설계력을 강화해야 한다.
국가 차원의 ‘K-AI 반도체 컨소시엄’을 만들어 산업, 학계, 연구기관이 함께 중장기 R&D 로드맵을 수행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는 새로운 제조업이다. 전력, 냉각, 망, 보안이 복합된 인프라 산업이며, 지방 균형 발전의 새로운 축이 될 수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데이터센터를 지방으로 분산하고, 남는 열을 난방·농업·산업단지와 연계해 순환형 에너지 구조를 만들면, 지역 산업과 고용이 함께 살아난다. 재생에너지, 소형모듈원전(SMR), 전력 PPA(Power Purchasing Agreement) 등도 AI 산업의 일부로 묶어야 한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교육 개혁은 AI 산업 정책의 핵심 축이어야 한다.
초·중등 단계에서는 정보교육을 넘어서 ‘AI 사고력’—데이터를 이해하고 문제를 구조적으로 푸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 대학은 산업과의 경계를 허물고, 교수·연구자·현장 전문가가 함께 가르치는 ‘겸임형 교육’을 제도화해야 한다. 정부는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AI 실무대학’이나 ‘AI 재교육센터’를 전국 단위로 세워야 한다.

중장년층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AI 문해력 교육도 필수다. AI가 사회 전반에 침투하는 만큼, 국민 전체가 기본적인 이해를 공유해야 사회적 저항이 줄어든다.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여 ‘전 국민 AI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지역 산업 특성과 연결시키는 구조를 만들면 좋다. 지방의 중소기업, 농업, 의료, 관광 산업은 현장 맞춤형 AI 교육을 통해 바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한국의 AI 전략은 중앙과 지방의 협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서울과 수도권이 설계하고 혁신을 이끈다면, 지방은 실험과 실행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
정부는 지방 대학과 공공기관을 ‘AI 거점’으로 지정하고, 지역 클러스터마다 데이터센터, 스타트업, 교육기관이 함께 있는 복합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각 지역의 산업 특성과 AI를 연결하면, AI는 기술이 아니라 지역의 생명줄이 된다.

이런 변화에는 막대한 재원과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지금의 미국과 중국이 선택한 길이다. 자국 이익을 위해 규범을 바꾸고, 필요하다면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동원하며, 시장이 아니라 정부가 기술 경쟁의 속도를 결정하고 있다. 한국도 더 이상 규범의 틀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정한 경쟁을 지키되, 국가의 전략적 산업에는 정부가 전면적으로 나서야 한다. 단, 그 개입은 민간과의 협력적 개입이어야 한다. 정부가 방향을 제시하고 기반을 다지면, 민간이 그 위에서 창의성과 효율성을 발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한국의 미래는 기술을 많이 가진 나라가 되느냐가 아니라, 기술을 어떻게 사회적 신뢰와 공정한 발전으로 연결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국민건강보험이 보여준 것처럼, 국가가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민간이 그 방향에 힘을 보탤 때, 사회는 효율과 형평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한국은 기술 강국이지만 전략 약국이다. 이제 그 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
철학이 없는 실행은 방향을 잃고, 실행이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 AI 시대의 국가는 이 둘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위한 도구가 되고, 데이터가 공공의 자산으로 작동하며, 혁신이 사회의 신뢰를 키우는 방향으로 설계된다면, 한국은 다시 한번 새로운 시대의 모범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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