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수용 - 팔자소관
조용헌의 『담화』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서구 정신분석이 억압을 해제하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려 한다면, 동양적 사고는 때로 운명을 받아들인다.
여성 단체 강의 후 일화. 한 아주머니가 남편 사주를 봐달라고 한다. "병신 일." 남편이 10년 전 외방 자식을 두었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되었다.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살아야겠네요!"
조용헌은 해석한다. "그 아주머니가 흘린 눈물은 쓰디쓴 현실을 팔자소관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체념인가 지혜인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이혼을 해야 한다. 받아들이려면 신앙심이 필요하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은 팔자로 돌리는 수밖에 없다."
라캉적으로 보면, 이것은 상징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자아의 환상을 내려놓는 것. 때로는 이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조용헌도 경고한다. "사주는 확률이지 100퍼센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운명론과 자유의지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나는 종종 "이것도 팔자려니" 하고 넘긴다. 월세가 오를 때, 연봉이 오르지 않을 때, 관계가 어그러질 때. 하지만 그것이 정말 팔자일까, 아니면 변화를 시도하기 두려운 나의 변명일까? 아주머니의 눈물처럼, 때로는 받아들임이 지혜일 수 있다. 하지만 조용헌이 틀렸던 것처럼, 우리도 틀릴 수 있다.
정화수행 - 실재와의 대면
이스터는 『편안함의 습격』에서 '미소기(misogi)'를 소개한다. 일본 신화의 이자나기가 지옥에서 돌아온 후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강물로 뛰어들어" 자신을 정화한 것처럼.
하버드 의대 출신 마커스 엘리엇의 실천이 인상적이다. 그의 원칙:
"과제가 엄청나게 힘든 것이어야 한다"
"죽지 않는다"
성공 확률 50%
"사람들은 이 작은 동그라미 안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잠재력이다' 하면서,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이것은 의도적으로 상징계를 벗어나 실재와 대면하는 것이다. 편안함의 영역을 떠나 불편함으로 들어가는 것. 놀랍게도 이것이 치유가 된다.
마크 시어리 박사의 연구가 이를 입증한다. "평생을 보호 속에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역경을 겪은 사람들이 정신적 안녕 지수가 높다."
통과의례의 부재
전통 사회에는 통과의례가 있었다. 마사이족 청년은 "혼자 사바나로 들어가 사자를 사냥"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6개월간 홀로 오지에서 생존했다.
반 제넵은 모든 통과의례가 세 단계를 거친다고 분석했다:
분리: 사회를 떠나 거친 세계로
전이: 자연과 싸우고 자신과 싸우며
통합: 변화된 존재로 귀환
현대 사회는 이런 통과의례를 잃었다. 대신 "헬리콥터 양육"과 "제설기 양육"이 등장했다. 부모가 모든 장애물을 치워버린다. 그 결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젊은이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라캉적으로 보면, 통과의례는 상징계에서 실재로, 그리고 다시 상징계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못한 현대인은 영원한 아이로 남는다.
친구가 최근 제주 올레길을 혼자 걸었다. 스마트폰도 두고, 지도만 들고. 처음엔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고. 발가락의 물집도, 어깨의 통증도, 그 모든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고. 그것이 그녀만의 작은 통과의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