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 지워진 이름들을 부르는 소설

by 북돌이


낯선 표지 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제’라는 두 글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제목이 아니라

의식의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소설은 제사를 뜻하는 ‘제(祭)’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이름,

혹은 지워진 흔적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이

다시 불려 나오는 순간,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문화 혐오의 얼굴

『제』는 미국 중부의 작은 마을

엔젤타운을 배경으로 한다.


1979년, 교회를 중심으로

삶이 돌아가는 폐쇄적 공동체.

그곳에 두 가족이 이주해 온다.


하나는 거대한 농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한국계 가정,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난하고 어눌한 영어를 쓰는

한인 이주민 가정이다.


같은 한국계라 할 수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부와 권력으로 차별을 감춘 ‘한’의 가족과,

적대와 멸시를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던

‘준’의 가족.


이 대비는 단순한 사회적 차이를 넘어,

혐오의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마을 주민들은 ‘한’을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같은 인종인 ‘준’에게는

거리낌 없이 증오를 퍼붓는다.


소설은 이 이중적 태도 속에서

‘우리’라는 말의 위험을 보여 준다.


연대의 표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경계와 배제의 장벽이 되어 버린다.


빙의라는 은유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치는

바로 ‘빙의’다.


‘한’은 점차 ‘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과 마음이 침투하는

기묘한 경험을 나누며,

계약 같은 우정을 맺는다.


빙의는 단순히 초자연적 장치가 아니다.


타인의 감각을 빌려 살아가는 경험,

그 자체가 다문화 사회에서의

‘이해’와 ‘공감’을 은유한다.


다른 이의 고통을 실제로 겪지 않는 한,

우리는 혐오를 멈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작가는 낯선 호러적 상상을 통해 풀어낸다.


그러나 그 빙의는

구원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때로는 저주이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결국 타인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고스란히 상처를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

이야기 속에서 또 하나의 축은

‘역사’다.


중국인 노동자 ‘촨’이 들려주는

골드러시 시대의 학살,


철도를 완성하자마자

몰살당한 이들의 비극은

주인공들에게 충격을 안긴다.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


"작품은 이렇게 묻는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소설은 제(祭)라는 의식을

문학으로 끌어와,

죽은 자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누군가의 증언을 통해,

소설을 읽는 행위를 통해,

잊힌 과거는 잠시나마 현재로 소환된다.


결국 문학은 증언의 자리이며,

동시에 제의의 장이다.


김준녕은 이를 통해

“문학 자체가 곧 제사”라고 말한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서늘하게 깨우는 제사.


낯익은 것이 낯설어질 때

소설의 가장 소름 끼치는 지점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것이

이질적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한옥의 지붕, 무당의 굿, 마늘 냄새.


한국에서라면 일상일 수 있는 것들이

이민자의 땅에서는

기괴한 것, 혐오의 표적이 된다.


그것은 단지 미국에서 만의 일이 아니다.


작가는 분명히 말한다.

지금 한국 사회 역시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고.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우리는 ‘우리’라는 말로

그들을 포용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더욱 단단한 벽을

쌓고 있는 건 아닐까.


제의로서의 소설

『제』의 마지막을 덮고 나면

묘한 감각이 남는다.


소설은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존재하는 역사와 현실을

조용히 보여 준다.


하지만 독자는 스스로 깨닫게 된다.

나의 무지, 나의 침묵이

또 하나의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성공적인 제의다.


불편하고 서늘한 마음을 남기는 것,

그것이 곧 기억을 환기하는 방식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지워진 이름들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소설 『제』는 말한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언제든 사라진다고.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어떻게 그 기억을 이어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이름들을 불러야 하고,

어떤 침묵을 깨야 할까.


당신은 지금,

어떤 ‘제’를 치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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