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런던에서 우연히 마크 로스코를 발견했을 때 그 찰나의 순간을 담은 사진이다. 미술관은 테이트 브리튼.
터너관이라고 해서 로스코의 작품을 만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마주치자마자 깜짝 놀랐다. 역시 모든 일은 예상치 못한 시간과 속도로 나에게 달려오는 법. 내가 가진 생각은 미래의 내가 마주할 그 어떤 것보다 작다는 사실이 새삼 행운이라 느낀다. 예상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에 불과한지. 또 내가 얼마나 작은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품 앞 소파에 앉아 계속 바라봤다. 바라봤다기보다 작품이 나를 잡아끌었다. 눈을 떼려야 뗄 수 없었다.
로스코의 작품을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린다는, '로스코 효과'가 있다. 내가 로스코의 작품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이 효과에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색면이 주는 어떤 내면의 침잠에 의해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몇몇의 특수성이 '로스코 효과'라고 명명되면서 관람객들이 작품에 대한 감동과 눈물에 부채감을 느낀 결과거나, 자기 충족적 예언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2023년 7월의 나는 로스코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나도 내가 눈물을 흘릴지는 전혀 몰랐는데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눈물을 시작으로 내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나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미술관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엉엉 (그렇지만 숨죽여) 울었다. 주체할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었다. 돌이켜 봐도 신기한 체험이다.
눈물의 정확한 이유와 의미는 알 수 없다. 내가 의심했던 자기 충족적 예언에 완전히 사로잡힌 걸 수도 있다. 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작품 앞에서의 나의 존재가 계속 커져서/작아져서 고립된/팽창된] 느낌이었다는 점이다. 어떤 크기의 감정으로, 어떤 크기의 나로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일상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크기와는 전연 다른 차원이었기에 설명할 수 없이 버거운 순간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숭고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수를 써서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했을 때 남는 결과는 예정된 실패와 존재에 대한 부재이다. 역설적이게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했을 때 완전히 실패하는 그 순간 표현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희미하게 느낄 수 있다.
예정된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작은 용기. 바로 그 순간 슬며시 등장하는 나보다 더 큰 나의 존재를 마주하는 지금 여기.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한꺼번에 나의 눈물로 나온 건 아니었을까.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로스코의 작품을 보아도 이때만큼 강렬한 감각을 느낄 순 없을 것이다. 그날 그 시간에 아주 형형하게 빛난 것은 다시는 반복될 수 없을 것이고, 반복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주 조금만 슬플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마주한 더 큰 것은 또 다른 언젠가 나와 마주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