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일 차
문득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이 떠올랐다. 당시로는 꽤 값이 나가는 장난감이었다. 호두까기 인형에 나오던 병정처럼 오른쪽 어깨에 장총을 걸치고 있던 것인데, 허리춤에 있는 태엽을 감으면 30초가량 음악이 나오면서 주변을 맴돌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음악이 멈출 때 녀석은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그 장난감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신나게 뻔질거리며 돌아다니다 결국 또 한 번의 월요일을 맞이하고 말았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도, 그래서 그 시간이 이젠 무섭게 느껴진다는 말도 전혀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까지만 해도 행복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이틀의 휴식일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좋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멀리 간다거나 특별한 스케줄 따위는 없었어도 주말이 있다는 자체가 그저 좋았을 뿐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토요일과 일요일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늘 주말은 짧다는 게 또 한 번 증명이 된 셈이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주말은 짧은 게 정상이다. 기껏 그래 봤자 7일 중에 이틀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닷새보다 이 이틀에 무게를 더 두다 보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생각해 보니 안 좋은 점 하나가 있고, 마찬가지로 좋은 점 또한 한 가지가 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월요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한 주를 버텨내야 한다. 일단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반갑진 않다. 어쩌면 생각지 못했던 복병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고, 잠잠했던 불씨가 되살아나 더 힘겨운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좀 더 쉬고 싶은 마음에선 더없이 좋지 않은 소식일 테다. 반면에 이 힘들 것 같은 닷새를 보내고 나면 다시 주말을 맞이하게 된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 바쁜 월요일 아침에 기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이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십 분쯤 늦고 말았다. 이대로 간다고 해도 늦게 출근할 일은 없지만,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다. 그런 가운데 어쩐 일인지 빈자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늘 그렇듯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죄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저 애물단지가 없던 시절엔 과연 어떻게 살아왔을까 싶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은 채 좌석에 몸을 깊이 묻고 있다. 지하철 안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다. 출근길에 아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경우는 드물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 누구 하나 옆 사람과 대화하는 이도 없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평온한 아침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책을 읽냐,라는 소리를 자주 듣곤 한다. 그것도 전날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라면 더더욱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런 와중에 나이가 지긋한 한 남자가 책 속에 손가락을 끼운 채 열차에 오른다. 무슨 책을 읽고 있나 싶어 흘깃 건네다 보지만, 하필이면 빳빳한 종이로 책에 표지를 해놓은 상태라 그가 어떤 책을 읽는지는 알 수 없다. 무슨 책인지는 몰라도 저렇게 표지까지 입혀 놓은 걸 보면 어지간히 책을 아끼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어쩌면 하나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 이런 공간에서 저렇게 책을 읽는 사람은 아마도 마음은 풍족하지 않을까, 하며 생각한다. 웬만한 마음가짐이 아니면 저러고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는 보기만 해도 따분해 보이는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한번 제목이 궁금해졌다. 글밥이 꽤 많고 큰 따옴표가 자주 등장하는 걸로 봐선 소설책 같았다. 나이나 외양으로 봤을 때 무협 소설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무협 소설에 저렇게도 공을 들여 표지를 씌운 이유도 궁금했다.
그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나 역시 가방 속에 넣어 둔 책을 꺼내어 읽고 싶어졌다. 그러나 순서로 보자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다. 얼른 끝을 맺고 난 뒤에 지난밤에 읽던 책을 마저 읽어야겠다.
어느새 마지막 정차 역을 앞두고 있다. 뭔가를 하기에 그다지 넉넉한 시간은 아니나, 마냥 눈을 감고 이동하기엔 아까운 시간이다. 별 의미도 없이 유튜브 영상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도 마뜩지 않다. 내가 한 편의 글쓰기로 하루를 열어가는 결정적인 이유다. 꼭 한 편을 다 못 쓰더라도 상관없다. 조금 있으면 다시 기차를 타야 하는데, 그때 가서 마저 쓰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