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일 차
확실히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추워졌다. 이래서 체감온도라는 게 무섭다. TV 뉴스에서 일일이 일기예보를 챙겨보지 않아도 당장 옷을 입고 밖을 나가기만 하면 알 수 있다. 똑같은 두께의 옷을 몇 개 껴입고, 어제 둘렀던 목도리까지 하고 나섰는데, 대번에 후회가 들었다. 여름에 더운 건 그렇다고 쳐도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것만큼 측은해 보이는 것도 없다. 우선 바람이 급격히 차졌다. 행여 옷깃 틈으로 바람이라도 들이칠까 싶어서 꽁꽁 싸매고 또 싸맸지만,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아침이라 더 춥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며 발걸음을 내디뎌 본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의 풍경이 삭막하기 그지없다. 너 나 할 것 없이 중무장하고 나선지라 여기저기서 툭 튀어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흠칫 놀리기도 한다. 마치 야생의 자연 속을 돌아다니는 포식자들처럼 저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어슬렁거리고 있다. 찬 바람을 피하려는 듯 잔뜩 웅크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곰 같다. 다가오는 누군가를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내게 갑자기 덤벼들거나 그러진 않으리라. 아마 나를 보는 타인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상대가 여자라면 지금과 같은 시대에 더하지 않겠나 싶다.
이번 겨울은 조금은 더 특이했다. 가을 없이 내게 곧장 찾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해마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비교적 날씨가 선선하거나 따뜻할 때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급격히 추워지면 겨울을 실감하는 것이다. 아니, 확실히 이번은 가을을 못 본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연한 가을의 기운을 느껴본 기억이 없다. 이상 기후라는 말을 끌어와 지금의 이 기이한 날씨를 두둔해 보지만, 그래도 제대로 한 번 가을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겨울을 맞이하니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분명 예전부터 그렇진 않았었다. 체감상 봄이나 가을보다 여름과 겨울이 더 긴 건 틀림없지만, 지금처럼 아예 봄과 가을을 잦아볼 수 없는 지경은 아니었다. 더위가 물러갔다 싶으면 곧장 추위가 찾아오고, 지금의 이 추위도 아마 얼마 안 있어 여름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겠나 싶다.
사회나 과학 교과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지구상의 그 어떤 곳보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이젠 이 부분도 현실에 맞게 바뀌어야 할 듯하다. 봄이 우리에게 없었던 것처럼 가을도 더는 우리와 인연이 없는 것 같다. 그 푹푹 찌는 폭염의 한가운데를 지날 때에도 어쩌면 가을 하나만 보고 달려온 것이 아닐까?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낙엽도 마음껏 밟아보고 싶었었다. 더러 깨끗한 몇 개쯤은 정성껏 코팅해 책 사이에 끼워두고도 싶었다. 볕이 넉넉한 휴일의 한낮은 야외 벤치에 앉아서 한 권의 책도 읽고 싶었었다. 그 좋던 가을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날짜로도 오늘은 12월 3일,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겨울이다. 이미 몸이 겨울로 들어선 이상은 물러날 곳이 없다. 좋든 싫든 지난여름을 묵묵히 헤쳐 나왔듯 눈앞에 놓인 이 겨울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지금의 이 추운 기운을 두고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오지 않았던, 아니면 오긴 왔는데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 가을에 대한 미련이 남아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미처 겨울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걸 느꼈다고나 할까?
오늘은 운 좋게도 열차 안에서 앉아 간다. 아니, 운이 좋은 게 아니다. 타자마자 그다음 역에서 내리는 사람 앞에 일부러 가서 섰다. 어쨌거나 그 덕에 이렇게 편한 상태에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면서 오늘은 어떤 하루가 펼쳐질지 기대해 본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본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꼿꼿한 겨울의 기운이 느껴진다. 얼핏 봐도 아직 겨울이 활개를 칠 때는 아닌 것 같이 보인다.
지금으로선 이 추위의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이 더없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나 또한 그런 것처럼 내 앞에 서 있는 이도, 맞은편과 옆에 앉아 있는 이도 잔뜩 껴입고 웅크린 채로 이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곧 열차의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쏟아져 내릴 테다.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새겨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 아니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