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반드시 함께 가야만 한다.

by Argos ryu

평일이든 주말이든 저녁 무렵, 편의점 앞이나 분식집 한켠에 앉아 김밥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 나라에서, 이런 저녁 풍경을 맞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전쟁을 치르고 있기에 집에서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밥 한 끼

먹을 여유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는가. 이것이 정상적인 사회인가.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있는 아이들

에게 우리는 왜 지옥을 선물하고 있는가. 마음껏 꿈꾸고, 상상하고, 행복해야 할 그 시기를 우리는 왜 ‘경쟁’

이라는 이름의 굴레로 씌워버렸는가. 아이들이 웃음을 잃은 사회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교육이란 결국, 아이들에게 정상적인 삶을 되돌려주는 일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문제를 알고 있지만, 아무도 시스템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교육 문제는 언제나 자신에게 닥치지 않으면 언제나 ‘다음 세대의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우리는 이 시대에 필요한 국제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전체의 90% 이상의 아이들이 버려지는 교육 시스템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왜 이런 구조를 계속 운영하는가. 제도 운영에는 분명 목적이 있을 텐데, 이 제도 속에서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영화 <설국열차〉처럼, 단지 10%의 아이들만 열차 맨 앞칸에 태워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유지하려는 것일까.

구체적인 운영 철학이 없는 모든 것은 즉시 멈춰야 한다. 교육이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는 나라에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 있을 리 없다. 교육은 국가 경쟁력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인간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사회 시스템이어야 한다.


조기 진로 선택의 강요


고교 시절은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 부른다. 그만큼 감정과 사고가 급격히 변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시기다. 이 시기의 모든 변화는 성장에 수반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육 제도는 그 변화를 ‘불안정’으로 규정하고, 조기 진로 선택을 강요한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미완의 아이들에게 완성형 인생을 강요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수업을 선택하며, 거기에 맞춰 선행학습으로 내신을 준비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대학은 자율전공학부를 확대하며 세부 전공의 문호를 계속 넓히고 있는데, 고등학생에게는 진로의 조기 확정을 강요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제대로 된 진로교육 한 번 받아본 아이가 드문데,

우리는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이들에게 진로 결정을 강요하고 있다. 집안의 재력과 부모의 관심으로 만들

어진 조기 진로가 곧 학생의 스펙이 되어 버리는 사회. 이것이 정상적인가.


작은 것부터, 하나씩


처음부터 완벽한 해법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나라도 시작해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교육정책 전반을 매번 갈아엎는 완성형 개혁이 아니라, 작은 주제부터 하나씩

실질적으로 해결해보려는 노력이다. 이것이 바로 함께 교육 개혁을 논의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우선, 이치에도 맞지 않고 정책을 시행할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고교학점제는 전면 중단되어야 한다.
또한 고교 내신 반영 비율 역시 진로 탐색의 시기, 집중의 시기, 학습 완성의 시기를 거쳐야 하는 중등교육의 철학과 성장 속도를 고려해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이는 구조, 예를 들어, 고1은 15%, 고2는 25%, 고3은 60% 를 반영하는 수준으로 즉각 조정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신중히 생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진로 고민으로 헤매는 사람이 허다한 세상에서, 열여덟의 청춘들에게

우리는 너무 이른 결정을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비율 조정은 단순한 점수 계산이 아니다. 늦게 피는

꽃도 존중하는 시스템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할 시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예시이며, 상식을 제도 안에

되살리는 시작 가능한 변화다. 수능은 자격시험으로, 내신은 성장 기록으로 둘 수 있다면 고3 내신 비중

60%는 이상적인 균형이 될 것이다.


교실 밖의 배움, 삶으로 확장되는 공교육


AI 시대의 교육은 더 이상 교실 안에서만 완성될 수 없다. 이제는 십 년이 아니라 한 달 만에 강산이 변할

정도로 현기증 나는 변화의 시기를 우리는 겪고 있다. 인공지능이 정보를 가르쳐주고, 데이터가 지식을

대체하는 시대에 학교의 역할은 정답을 암기시키는 곳이 아니라 세상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법을 배우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배움의 공간 역시 교실을 넘어야 한다. 학교 밖에서의 경험이 학습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 경험이 곧 아이들의 ‘삶의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 각종 창작 활동, 탐구 프로젝트, 지역 사회 봉사, 공공정책 참여, 스타트업·연구기관 인턴십, 문화예술 창작, 디지털 콘텐츠 제작, 지역 사회 정책 제안 등

학생의 자발적 경험을 공교육의 정식 학습 과정으로 편입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외부활동의 기록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경험을 설계하고 실행하며 평가받는 시스템이다. AI 시대의 교육은 바로 이런 경험 설계

능력을 핵심 역량으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지역 사회의 대중교통 문제를 탐구하고 AI 분석

툴로 데이터를 시각화한 뒤 이를 기반으로 지자체 정책 제안을 제출했다면, 그 자체로 물리·통계·사회·윤리

학습이 교차된 융합적 성취가 된다. 이런 시도는 교실 안의 시험 점수보다 훨씬 깊은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

학교 밖 학습에 대한 인증은 결국 공교육의 문호를 교문 밖으로 확장시키는 장치다. 이는 학교의 권위를

낮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학교를 사회와 연결하는 개방의 문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배움의 장이 사회와

연결될 때 교육은 비로소 살아 있는 지식이 된다. 공교육이 교실의 벽을 넘어 ‘삶’ 그 자체로 확장될 때,

우리는 비로소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세상과 연결된 진짜 자유를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의 속도 조절


교육은 정권의 변화 속도가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 속도에 맞춰야 한다. 정책을 밀어붙이기보다 학교가

준비하고, 사회가 이해하며, 아이들이 적응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개혁이 늦어도 괜찮다. 교육은 정권의

업적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로 완성되는 공동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느리더라도, 함께


교육정책은 정권의 교체와 관계없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만 변경되어야 한다. 느리더라도,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가자. 그래서 10년이 걸리더라도, 100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올바른

방향과 철학을 갖춘 교육을 아이들에게 선물하자. 개혁은 결승점이 아니라 여정이다. 누군가는 멈춰서 기다

려야 하고, 누군가는 뒤를 돌아봐야 한다. 그러나 함께 가지 않으면, 결국 아무도 가지 못한다.


느려도 괜찮다.

함께 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공교육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이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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