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 이야기 [ep.01]

60년의 시간, 1킬로미터의 기록

by 이건국

2025년 1월,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4 구역. 오래된 건물 외벽에 붙은 철거 안내문이 겨울바람에 펄럭인다. 상가 1층 셔터 대부분은 내려져 있고, 간간이 불이 켜진 가게에서는 여전히 전자 부품을 정리하는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50년 넘게 이곳을 지켜온 이들에게 철거는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79년, 1988년, 2006년. 이미 세 번이나 철거 계획이 발표되었다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정말 사라질지도 모른다.


SEOUL-Sewoon-Sangga-il-contenitore-chilometrico-polivalente-1967-69.jpg 세운상가 1968년 (서울 정보소통광장)


같은 건물, 다른 시선

건물 하나가 사라지는 건 흔한 일이다. 서울에서는 매일 어딘가의 건물이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올라간다. 그런데 왜 유독 세운상가는 60년 가까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걸까? 사람들이 싸우는 건 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건물과 함께한 기억 때문인 걸까?

어떤 이에게 세운상가는 미래 도시의 상징이다. 또 어떤 이에게는 전자상가의 활기가 살아 숨 쉬던 곳이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낙후된 슬럼일 뿐이고, 최근 몇 년간은 도시재생의 희망으로 보이기도 했다.

같은 건물인데, 사람마다 전혀 다른 것을 본다. 흥미로운 건 세운상가의 물리적 형태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당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변한 건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었다.


건축가가 그린 청사진

김수근이 세운상가를 설계할 때, 그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새로운 도시를 상상했다. 땅 위에 또 다른 땅을 만들어 올리고, 사람들이 지상의 혼잡함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이동하는 입체적 미래. 그 청사진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구현되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 건물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자 부품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기술자들이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청소년들은 금지된 것들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건축가의 의도와는 다른, 그러나 더욱 생생한 삶이 펼쳐졌다.

그리고 작가들은 그 풍경을 각자의 언어로 포착했다. 소설가는 이곳을 욕망의 공간으로 그렸고, 시인은 자유의 기억으로 남겼다. 영화감독은 때로 폭력의 무대로, 때로 일상의 터전으로 담아냈다. 건축가가 그린 미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변형되었고, 그 경험은 다시 이야기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는 다시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종묘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녹지축. 세운상가가 사라진 자리에 공원이 들어서는 풍경.


흐르는 이미지

건축가의 상상이 물리적 공간이 되고, 그 공간 속에서 사람들의 경험이 쌓이고, 작가들이 그것을 텍스트로 재구성하고, 다시 누군가 새로운 미래를 그린다. 이 순환 속에서 세운상가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미지였다.

물리적 형태는 60년 가까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계속 달라졌다. 시대가 바뀌고, 정책이 바뀌고, 경험이 쌓일 때마다 같은 건물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 연재는 그 흐름을 따라가 보려는 시도다. 건축가가 그린 청사진에서 시작해,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사람들은 그 공간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작가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는지. 그리고 정책이 바뀔 때마다 이 건물을 보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다음 회부터 나는 이 1킬로미터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갈 것이다. 화려한 담론 대신 담백한 기록을 통해, 세운상가가 품고 있는 시간의 층위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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