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을 못하는 나의 뇌
나의 사랑하는 아내는 때때로
캐캐묵은 옛날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술안주상 위에 올린다.
마치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잘 입지도 않으면서 끝내 버리지는 못한
겨울옷을 꺼내어 보는 것처럼.
퀴퀴한 냄새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이야기가 시작되면
나는 너무나 뻔한 결말을 먼저 떠올린다.
너무 익숙하고, 이미 여러 번 가본 길이며,
늘 후회로 끝났던 대화다.
그래서 오늘은 말을 아끼기로 결심한다.
물론 이 결심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맥주 캔을 만지작거린다.
손끝의 찬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며 모공이 수축한다.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일어서고 귀 안쪽이 간질간질하다.
이건 분명 긴장한 신체가 먼저 보내는 신호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오늘은 기필코 듣기만 하리라.
하지만 그 다짐은 표정을 굳게 만들고
자칫 화난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빈속의 위장이 놀란 듯 전율한다.
위는 언제나 솔직하다.
뇌보다 먼저 반응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의 옛날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음성 인식 기능을 풀가동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고 눈을 맞춘다.
경청의 삼종 세트다.
.
.
5분.
10분.
.
.
시간이 흐르며 취기가 조금씩 올라온다.
취기가 오르자 전두엽은 방전되고,
편두엽은 에틸알코올을 만나
‘해결사’로 변신한다.
갑자기 세상 모든 문제는 도식화가 가능해진다.
원인, 결과, 대안이 놀라울 만큼 또렷해진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아, 이건 익숙한 패턴이구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결국 사건을 해결하려 든다.
아주 친절한 얼굴로, 아주 치명적인 말을 꺼낸다.
.
“아니… 그럼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생각을 좀 바꿔야 될 것 같은데.”
.
그 순간 둘 사이의 공기는 얼음이 된다.
그녀의 남편은
자연스럽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공감 1도 없는 남의 편이 된다.
내 말에는 해결책이 있지만 체온이 없다.
정답일 수는 있으나 위로는 아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술잔.
나는, 아내가 나와 이혼하고 싶은
2만 5천 가지 이유를 차례로 듣게 된다.
차라리 답 없는 옛날이야기를
끝까지 들었어야 했다.
사실 나는
아내의 감정을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
그녀가 겪은 고통을 나는 살아본 적이 없고,
같은 사건이라 해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결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느낀다’는 말은
어쩌면 가장 그럴듯한 위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같이 아파하는 척이 아니라,
없애려 들지 않는 것이다.
아내는
기억의 저 밑바닥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낸다.
낡고, 모서리는 헤어졌고,
앞면에는 사건의 제목이 적혀 있다.
뒷면에는 수십 개의 질문과
체크 박스가 빼곡하다.
.
아직도 아픈가
덜 아픈가
웃으며 말할 수 있는가
꿈에 나오는가
눈물부터 나오는지
오늘은 이 흉악한 기억이
얼마나 추억으로 바뀌었는지
.
.
다시 꺼내보고, 또 꺼내보며 하나씩 체크한다.
이건 조사도 아니고 판결도 아니다.
그저 확인이다.
“아직 여기 있구나.”
“아, 조금 옅어졌네.”
내 역할은 단순하다.
그 카드를 꺼내어 보는 동안
옆에 앉아 같이 바라봐 주는 것.
체크하는 손이 떨릴 때 그 손을 잡아주는 것.
해설도, 해석도, 분석도 아닌 증인이 되는 것.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반복 재생’하는 일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카드가
아내를 괴롭히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찢어버리고 싶어진다.
다시는 꺼내지 못하게
깊숙이 묻어버리고 싶어진다.
이건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동시에 폭력이다.
그래서 아내는
나의 해결책을 들을수록
더 아파한다.
나는 차가운 사람,
공감 1도 없는 인간,
말귀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된다.
공감은 그런 것이다.
해결이 아니다.
종결도 아니다.
같은 장면을 다른 감정으로
다시 바라보는 작업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영화관이 아니라,
소장용 DVD를 반복 재생하다가
이제는 켜지 않아도 모든 장면이 떠오를 만큼
몸에 새겨진 뒤에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는 것.
공감이란
기억을 없애주는 능력이 아니라
기억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동행이다.
공감을 어려워하는 나의 뇌는
창작 앞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우리는 막히는 순간마다 새로운 카드를 찾는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누군가의 성공 사례를 뒤적인다.
이미 테이블 위에 앞면이 보이는 카드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도
계속 새로운 덱만 찾고 있다.
창조적인 뇌를 깨운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집어넣는 일이 아니다.
더 깊이 이해하는 기술도, 더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짜내는 능력도 아니다.
그건 오히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끝까지 바라보는 태도에 가깝다.
해석하지 않고,
분류하지 않고,
“왜 이런 거지?”라는 질문마저
잠시 내려놓는 것.
뇌가 자동으로 꺼내 드는 설명서와 사용법을
조용히 내려놓는 순간,
감각은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이는 카드들을 하나씩 집어 들고
조용히 확인하는 것이다.
억지로 버리지도 않고, 급하게 정리하지도 않는다.
그저 충분히 보아주는 것.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집어 들 카드가 없어지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때 새로운 카드를 뒤집어도 늦지 않다.
그래서 공감이란, 상대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는 의지가 아니라
그 고통을 바꾸려 들지 않는 태도에 더 가깝다.
우리는 흔히 공감한다는 이름으로 상대의 생각을 교정하려 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려한다.
그러나 그 순간 공감은 조언이 되고, 위로는 설득이 되며, 대화는 미묘하게 실패한다.
이 방식은 타인을 공감하지 못하게 만들 뿐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조차 공감하지 못하게 한다.
살아온 인생과 그 안의 시행착오,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를 부정한 채
‘업그레이드된 나’만을 진짜 나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을 계속 개선하고 개조하면서도,
정작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상처는 꺼내 보지 못한 채 봉인된다.
상처는 들여다보지 않는 한 치유되지 않는다.
과거를 반복해 꺼내는 일은 미련이 아니라 용기다.
답답해 보이는 그 서랍을 다시 여는 행위야말로,
스스로를 처음으로 공감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역시 암울한 유년의 이야기를 자꾸만 꺼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낡은 이야기들 사이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생각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과거 얘기를 꺼내는 아내는
과거에 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신을 돌아보는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