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사소하지 않다

맥스 시덴토프 개인전

by 말하는 돌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어떤 종류의 긴장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시대 미술이 종종 요구하는, 이해해야 할 것들과 해석해야 할 것들로 빽빽이 채워진 밀도의 공간. 그러나 맥스 시덴토프의 전시는 그 긴장을 아주 가볍게—거의 손끝으로 밀어내듯—물러나게 한다. 설명보다 먼저 웃음이 도착하고, 생각은 그 뒤를 조용히 따라온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일상에서 시작된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눈길이 머물지 않게 된 사물들—의자, 전등, 손잡이, 생활의 가장 평범한 뼈대들. 그러나 그 익숙함은 작품 안에서 미세하게 어긋난다. 기능은 남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흔들리고, 형태는 그대로인 듯하지만 어딘가 비틀려 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춘다.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긋남을 감지하기 위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웃음이 발생한다.


그 웃음은 단순히 우스워서 터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한순간 미끄러지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질서가,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어긋나는 순간. 시덴토프는 그 틈을 확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소한으로만 건드린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긋남을 '발견'하게 된다—마치 처음부터 거기 숨어 있었던 것처럼.


이 전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유머가 어떤 메시지를 대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판을 위해 웃음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웃음 자체를 하나의 구조로 세워둔다.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감각, 그러나 분명하게 사고를 흔드는 방식으로 남는 경험. 작품 앞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그 웃음이 무엇인지는 즉시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전시장을 걸어 나오는 동안에도, 방금 전의 장면들은 자꾸만 되돌아온다. 그때의 웃음은 이미 지나간 감정이 아니라,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하나의 생각이 된다. 사물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조금 달라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물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혹은—더 정확히는—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덴토프의 작업은 거대한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균열을 남긴다. 그러나 바로 그 균열이 일상을 다시 열어젖힌다. 사물은 고정된 기능이 아니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의 형태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가능성은 의외로 가볍고, 동시에 깊다.


우리는 오랫동안 웃음을 가벼운 것으로 분류해왔다. 진지함의 반대편에 놓인 것, 잠깐의 해방이거나 쉽게 소모되는 감정으로. 그러나 이 전시는 그 구분을 조용히 무너뜨린다. 웃음은 도피가 아니라, 세계를 다시 보는 방식이다. 의미를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드러내는 것.


어쩌면 이 전시는 우리를 웃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웃는지를 묻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일상은 그대로인데, 더 이상 같지 않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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