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어쩌다, 귤을 따며 어른이 되어갔던 이야기를 마치며...

처음 제주에 내려와 귤밭 안에 있는 집을 안내받았을 때만 해도, 내가 이 시골에 이렇게 잘 적응하며 8년이 넘게 살 줄은 몰랐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은 채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시큐리티가 철저한 50층 고층 아파트에서 하늘에 떠 있는 듯한 삶을 살았던 내가 이제는 섹시한 구두 대신 발이 편한 운동화를 신고 흙을 밟으며, 오래된 주택에서 땅의 기운을 듬뿍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나는 너무 극에서 극으로 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에서 맞이하는 아홉 번째 가을을 여전히 무척 잘 지내고 있다.


귤밭에서 보낸 수많은 날 중에 지난 겨울, 마지막 귤따기를 떠올려본다. 고마운 제주사람1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내일 한라봉을 따러 와 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이른 아침 귤밭으로 향한다. 오늘은 고마운 제주사람1의 큰누나네 귤밭이라 도시락을 챙길 필요가 없다.


귤밭에 도착하니 귤밭 주인 할아버지가 모닥불을 쬐며 기다리고 계셨다. 벌써 만난 지 2년이 넘었구나. 얼마 전 큰 수술을 하신 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다행히 많이 좋아지신 듯하다. 이전보다 얼굴이 훨씬 밝고 건강해 보이셔서 안심이 되었다.


귤밭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맥심 모카골드 믹스 커피를 한잔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나눈다. 그 사이, 오늘 함께 귤을 딸 사람들이 모두 도착했다. 나는 오늘 귤 따기에 특별한 규칙이 있냐고 묻는다.


"응, 한라봉에 잎 하나 붙여서 따줘!"


초록 잎 하나쯤이야 별거 아닐 것 같지만, 잎을 붙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귤 따는 속도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잎은 왜 하나 붙이는 거냐고? 잎이 달린 귤이 더 신선해 보이고 상품 가치가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키만큼 큰 사다리가 있는 걸 보니, 이 귤밭의 귤나무들이 꽤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한라봉 따는 일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작업이다. 귤나무가 커서 사다리를 오르내려야 하고, 귤을 던져서도 안 되며, 귤 꼭지가 귤을 찌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려놓아야 하기에 일반 귤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간다.

오랜만에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사다리를 들고 다녔더니 다리에 멍이 여기저기 들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귤밭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즐거움" 때문이다.


귤밭 안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모닥불, 달달한 맥심 모카골드 믹스 커피 한 잔, 제주 현지인이 직접 차려주는 제주의 계절을 담은 푸짐한 제주 로컬 집밥, 귤을 따다 목이 마르면 톡 따서 맛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신선하고 맛있는 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어디에서 또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사람들이 제주를 단순히 '관광의 섬'으로만 보는 것이 안타깝다. 진짜 제주는 따로 있는데 말이다. 내 외국인 친구들도 제주를 알고 있는 걸 보면, 제주가 꽤 유명한 섬이긴 한 것 같다. 하지만 '제주다운 제주'를 여행하고 싶다면, 꼭 한 번 귤밭에 가보기를 추천한다.


귤꽃 향기를 맡고, 귤나무를 배경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직접 귤을 따보길. 운이 좋다면 귤나무 장작으로 바비큐를 구워 먹는 행운이 당신에게도 찾아올지 모른다.


제주에 오기 전, 나는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들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이렇게 맛있는 귤을 먹고, 안전한 나라에서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도 내가 받은 것들을 또 다른 이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짐을 함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도 새벽부터 귤밭으로 향할 농부들에게,

그리고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상처받는 이 지구 위 수많은 생명체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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