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음’으로 이야기하는 감정
창작은 감정을 단순히 ‘표현’하는 일이 아니다. 감정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감정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진실을 따라 흐르는 고유한 리듬이다. 이번 글에서는 실제 예술가들이 감정의 진실을 자신의 음악 속에 어떻게 구현하는지, 그 안에서 어떻게 감정을 살아 있도록 만들어 내는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으로 몇 편에 걸쳐 함께 나눌 이들은 감정을 억지로 재현하지 않고, 음악 안에 감정의 구조와 결을 살아 있도록 하여 그 진실을 직조해 낸 이들이며, 그 음악에 담긴 이야기다.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작곡가 – 정재형
우리는 ‘말’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잘 알고 있다. 힘을 가지고 있는 ‘말’로 만들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담은 ‘음악’은 더 큰 힘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때로는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전할 수도 있다. 말보다 더 조용하지만 깊게 다가오는, 또 말로 전달하는 감정보다 더 섬세한 감정이 존재한다. 작곡가 정재형은 바로 ‘말하지 않음’의 미학을 자신의 음악에 담아 감정의 진실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예술가이다.
정재형에게 감정은 해소하거나 증명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첫 피아노 연주 앨범 「Le Petit Piano」의 모든 수록곡은 감정을 설명하거나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이 조용히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연주로 만들어 낸다. 그 수록곡 중 〈겨울의 정원〉의 피아노 선율은 잔잔한 호흡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반복되는 진행과 절제된 리듬은 감정이 억지로 유도되지 않도록 여백을 남기며 흘러간다. 감정이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의 음악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낮은 언덕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과 고요함, 포근히 비추는 겨울 햇살의 따스한 감정까지도. 그 모든 ‘머무름’은 말을 통해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음악은 그저 잔잔히 흘러가며, 우리의 감정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조용히 열어주고 있을 뿐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말보다 더 섬세하게 나만의 시선으로 내면에 담긴 겨울의 감정을 마주한다.
듣는 사람이 남이 아닌 자기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중략)
이런 음반을 통해 사람들이 주위를 벗어나
‘나’만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 정재형 스타뉴스 인터뷰(2010. 4. 25.) 中 -
그는 한 인터뷰에서 위와 같이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감정의 내면을 꺼내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감정이 존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철학이 담긴 그의 음악은 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그 안에서 나의 감정을 듣는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감정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어쩌면 그것은 음악이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감각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며,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품는 그의 음악적 미학일지도 모른다.
소개한 곡 외에도 이 앨범의 모든 수록곡이 같은 방식으로 작곡되었다. 그 곡들 역시 ‘말하지 않음’, 즉 ‘비워냄’을 통해 또 다른 ‘충만함’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충만함’ 속에서 우리는 감정이 존재하는 음악의 힘을 다시금 경험하게 된다. 때로는 위로처럼, 때로는 혼자만의 고백처럼. 어쩌면 음악에 담긴 이 ‘침묵의 미학’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깊은 감동을 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의 음악은 ‘말하지 않음’으로 우리에게 진실한 감정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건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