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F야, T야?" 그 질문이 불편했던 이유

내가 다시 정의한 ‘공감’이라는 단어

by 쏘꽁

MBTI가 유행이다.

아니다, 이젠 그것도 좀 지난 걸까?


그런데 아직도 사람들은 묻는다.
“너 F야? T야?”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찜찜하다.


F(feeling)냐, T(thinking)냐.
감정형이냐, 사고형이냐.
공감 잘하는 사람이냐, 이성적인 사람이냐.


이분법적인 질문이지만, 사람들은 이 질문으로
누군가의 성향과 감정 깊이를 판단하려 한다.


나는 대학생 땐 T였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려 했고,
감정보다 이성이 낫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랑을 하며
나는 점점 F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F였는데
그걸 억누르며 살아왔던 건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면서,
T의 사고로 감정을 다룬다는 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서운하고 아팠다.
하지만 상대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성적이었다.
그 이성적인 태도에 더 상처받았다.


F인 내가 T의 위로를 들으면
머리가 띵하다.


아무 말도 안 나온다.
웃음만 나온다.
어이가 없어서랄까.


‘T는 도저히 따뜻한 말을 할 수 없는 인간일까?’


수없이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T의 남편과 산다


남자친구도 아닌,
퇴근 후 ‘잘 자’ 하고 각자 돌아가는 관계도 아닌,
하루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
내 남편은 철저한 사고형, T다.


연애 때부터 우리는 많이 다퉜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이해받으려 애썼다.


그래서 더 많이 다쳤고, 더 많이 상처 줬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남편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도 나를 답답해했다.


F인 나는
마음속 힘든 상황을 풀어내고 싶었고,
남편은 그걸 문제 해결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원한 건 해결이 아니라,
단지 공감이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저 “힘들었겠다”는 말 한마디.


하지만 T에게 그것은
의미 없는 말처럼 들렸던 것 같다.


어떤 감정은
누군가가 해결해 줄 수 없다.


가족의 죽음, 실연,
어린 시절의 결핍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해결이 목적이 아니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감정이 말이 되고,
그 말을 누군가 들어주는 순간,
그제야 비로소 생각이 시작된다.


감정을 ‘사고’하게 만드는 건
조언이 아니라 경청이다.


공감은 쉬운 행위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하지만 나는 그 정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상대의 감정과 내가 똑같이 느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 감정은 오로지 그 사람만의 것이다.
그걸 내가 ‘나도 그래’라고 말하는 건
때때로 무례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공감 = 경청.


경청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듣는 일이다.


어떤 판단도, 감정도 끼워 넣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의 말로써만 듣는 일.


내 생각이 개입되는 순간,
그건 조언이 되고,
그 조언은 무심코 그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 수도 있다.


경청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그 말속으로 들어가,
그 감정이 흘러가는 결을 따라간다.


그 입장이 되어주는 그 순간.
그게 진짜 공감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제 F냐 T냐가 중요하지 않다.
감정형이든 사고형이든,
진짜 중요한 건
‘공감할 수 있는 태도’다.


공감은 MBTI 유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쭙잖은 공감이나 조언보다,
그저 묵묵히 듣는 경청이
가장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오늘, 당신은 누군가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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