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2018. 10. 30

by conair

“시대는 흐른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시대를 지나간다. 가버린 뒤에 돌아보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일제 강점기의 거센 바람은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흩날리는 것들에겐 이름이 없었다. 당시 한반도에선 전국적으로 도굴이 행해졌다. 그렇게 빼앗긴 문화재 수 만점들이 다른 나라로 무력하게 흘러 나가고 있었다.


종로에서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전형필은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세상을 떠난 부친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스물네 살의 청년 전형필은 서화가이자 지식인, 독립운동가였던 위창 오세창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되었다. 추운 겨울 깊은 산속에서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 그곳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선 소나무와 같은 마음을 지녔던 전형필. 논어 자한 편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즉,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 구절이 있다. 오세창 선생은 전형필에게 산골물 ‘간’ 자와 소나무 ‘송’ 자를 넣어 ‘간송’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이 땅에 이름이 없는 시대였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시대였다. 모든 것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야 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일 수 있는지는 스스로의 삶의 궤적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간송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삼국시대부터 조선 근대에 이르는 작품들을 수장했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차마 버려둘 수 없었던 우리 문화의 가치를 지켜냈던 것이다.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우리글과 말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우리의 이름들은 지워졌다. 그래서 간송은 훈민정음을 더 애타게 찾고 싶어 했고 끝내 그 꿈을 이루었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수장품 중에서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잠잘 때는 베갯 속에 넣어서 지켰다. 그리고 훗날 국보 제70호가 된 <훈민정음> 원본을 통해 한글의 제자 원리가 밝혀지면서 그 우수성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33세였던 1938년 간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을 설립했다. 보화각.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을 지녔다. 이곳은 현재 간송미술관이 되었다. 후손에게 우리의 찬란한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자 했던 간송의 뜻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이러한 간송의 뜻이 더 널리, 오래도록 이 땅에 살아 숨 쉬려면 민족혼에 대한 교육이 바로 서야 했다. 간송은 1940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사학인 보성학교가 재정위기에 처하자 어렵게 보성을 인수했다. 이후 총독부로부터 갖은 탄압과 고난을 이겨내야 했지만 결코 민족교육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았다.


시대는 흐른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시대를 지나가지만 그의 삶이 시대를 겪어낸 흔적은 삶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살아있다. 삶은 짧았지만 한 사람보다 더 긴 삶의 흔적을 남겼던 간송 전형필이 있었다. 간송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낸 것은 먼 훗날까지 이어져야 할 우리 민족의 얼과 문화였다.”


대구미술관 간송특별전 입구의 간송소개 영상에 나오는 문구다.


시대상황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삶은 불가능하다. 국가, 사회, 무리, 직장, 가족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은 없다. 그래서 무(無) 인지도, 그래서 무아(無我) 인지도 모른다. 개인이 시대상황에서 한 발짝도 비켜설 수 없는 시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당하는 시대이며, 불행한 시대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는 친일이냐 독립투사냐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다소 정답이 정해져 있어 선택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의 삶을 살 것인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더 힘들다. 그러나 이보다 더 힘든 선택은 해방 후 공산주의자가 될 것인지 자본주의자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똘레랑스’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기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하나로부터 악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이데올로기로 양분된 한반도에서 자신의 삶을 희생당했는가. 어디 자신의 삶뿐인가. 연좌제에 엮여 자식의 삶까지도 남과 북에서 ‘악’으로 터부시 되어야 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던 민초들까지도 ‘부역’이라는 죄명아래 목숨을 잃어야 했던 암울한 시대였다.


간송은 이런 암울한 시대에 우리 문화의 얼을 지키는 일에 매진한 선각자이다. 애국의 길이 여럿 있지만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는 일도 그 어떤 일보다 가볍지 않다. 문화의병이다. 역사와 문화, 선조의 혼을 되찾으려는 간송의 간절함이 전해진 것인지 대구미술관에는 간송특별전을 보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도 두 번이나 갔는데 주말이어서 그런지 너무 많은 사람들로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주 중에 시간을 내어 느긋하게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수업을 팽개치고 갈 수 도 없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위의 간송 소개글을 읽어 주고 꼭 시간을 내어 가 보라고 강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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