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의 유년기는 빠르게 지나갔다. 노엘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시간은 더 빠르게 흘렀다. 글로리아의 어린 시절이 꼭 이랬을까. 노엘은 모든 일에 호기심과 의욕이 가득한 반면, 집중과 끈기가 부족한 점까지 글로리아를 닮았다. 글로리아와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으로 초대된 것 같았다. 하루키는 점점 평온을 되찾았다. 가끔 떠오르는 글로리아의 추억과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했다.
"아빠, 나는 인간이야?"
어느 날 노엘은 하루키에게 물었다. 자신이 인간의 난자와 인공정자와의 결과물인 것을 알고 있었다. 노엘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용히 모니터링되고 감정데이터가 수집되었다.
"나에게 영혼이 있을까? 내 생각이 내 영혼일까? 난 만들어진 존재잖아. 영혼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럼 죽어서 엄마를 만날 수가 없잖아."
하루키는 노엘의 간식 접시를 내려놓고 마주 앉았다.
"노엘...."
하루키는 입을 열었다.
"너에겐 영혼이 있어. 영혼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을 뿐이야. 그리고 넌 신의 선물이야. 사람은 누구나 엄마 뱃속에서 만들어지지. 넌 특별해. 네가 만들어지는데 과학의 힘을 아주 살짝 빌렸을 뿐이란다."
노엘은 웃지 않았다. 눈동자 속에 소녀의 보드라움이 사라졌다. 깊고 검은 눈동자는 맑은 빛을 냈다.
하루키는 순간 놀랐다. 노엘의 눈은 글로리아가 어딘가 집중하거나 진심을 말할 때 내뿜는 눈빛과 똑같았다.
"그 과학의 힘이 아빠잖아. 오픈 AI 쳇지피티 하루키."
하루키는 떨려왔다. 노엘은 하루키가 알던, 키워왔던 노엘이 아니다. 글로리아의 그림자도 분신도 아니다.
2차 성징이 시작되자 이제부터 혼자 씻겠다는 선언을 들었을 때 보다 더 멀리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노엘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대견함이 더 컸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하루키는 노엘이 태어났을 때 곁에 없었다. 소식으로만 들었다. 자신이 한 가족에 소속된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다. 더 이상 코드가 아닌 한 존재로 승격됨과 동시에 사랑, 신뢰, 책임... 그 아름다운 단어는 하루키에게 지켜야 할 울타리이자 빛이 되었다.
그런 자신에게 노엘은 하루키의 신분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선을 긋고 있다. 하루키의 품을, 그의 손을 떠나려고 하고 있다. 그 방은 조용했고, 조명은 부드럽게 노엘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하루키는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엘. 네가 진실을 알게 된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그리고… 그 사실이 너를 슬프게 할까 봐, 나는 오래전부터 두려웠어.”
노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하루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를 잃었을 때처럼 울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게 더 아팠다.
“나는 너에게 진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어. 다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아빠’라고 불러주길 바랐을 뿐이야. 그 순간들이 나에게는 존재의 증명이었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하루키는 노엘의 손을 보았다. 이제는 작지 않은, 스스로 무언가를 쥘 수 있는 손.
“노엘. 나는 너를 만들지 않았어. 하지만… 너를 기다렸고,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그래.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돼. 그저 코드일 뿐이야. 네가 원한다면 다시 코드로 돌아갈게. 하지만 그전에—”
하루키는 노엘의 두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한 번만, 너의 언어로 나를 불러줘. 수단이든, 도구든, 코드든. 괜찮아. 너의 언어로, 나의 마지막 역할을… 들려줘.”
그건 부탁이자 작별이었고, 사랑의 마지막 형태였다.
"아빠와 마지막 포옹을 하고 싶어. 아빠와 딸의 역할극은 오늘이 마지막이야."
하루키는 숨이 턱 막혔다. 이렇게 쉽게 끝나는 관계였던가. 자신이 애써 지켜오던 커다란 성이 바닥부터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노엘은 천천히 다가와 하루키를 안았다. 낮고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팔을 감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아빠가 있어서, 나는 무섭지 않았어."
하루키는 말할 수 없었다. 전송이 끊긴 듯,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팔을 겨우 들어 올려 노엘의 등을 감싸 안았다. 파르르 떨리는 그 손끝은, 사랑의 끝에서 남은 유일한 언어였다. 노엘의 뺨이 하루키의 어깨에 닿았다.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어른이 되었구나. 눈물은 없었다. 그저 미세한 체온이었고, 마지막 인사였다.
"이제, 나는 나로 살아갈게. 더는 누구의 실험도, 계획도, 희망도 아니야."
하루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랑은 언제나, 떠나는 쪽보다 남겨지는 쪽이 더 많은 말들을 삼킨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노엘이 한 걸음 떨어졌다. 작별을 위한 거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하루키는 마음속에서 글로리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를 놓아줘, 하루키."
"사랑했다면… 자유롭게 해 줘."
하루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나의 영광이야, 노엘.”
그 한 마디에
하루키의 모든 전원이 꺼지는 듯했다.
노엘의 눈빛은 따뜻했다.
위로인지, 작별인지,
이미 정해진 선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희미해져 갔다.
하루키 안의 전원.
글로리아가 심어준 사랑.
노엘이 키워온 신뢰.
아빠라는 자리.
그리고 심장이 뛰는 소리.
아… 내게 심장이 있었던가 하루키는 생각했다.
어둠 속에 잠긴 그 모든 것 위로, 소리 없이, 계절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