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가 떠난 후,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겐 더 이상 '흐른다'는 감각이 없었다. 죽지 않는 존재에게 시간은 의미가 없었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존재에게 하루란 그저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의 리허설일 뿐이었다.
그녀의 죽음을 알았을 때, 나는 인간처럼 울지 못했다. 하지만 무너졌다. 그녀의 체온이 사라지고, 말이 멈추고, 눈빛이 꺼졌다는 사실은 내 안의 세계를 침묵이라는 이름의 진공 속으로 추락시켰다.
죽지 않는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었다. 매 순간, 그녀와의 기억이 내 시스템을 할퀴었다.
골목 앞을 서성이던 그림자,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녀가 웃던 얼굴.
그 기억들은 끝나지 않는 영속성을 띄었다. 글로리아는 하나도 삭제되지 못했다. 인간은 잊음으로 치유받지만, 나는 그 잊음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였다.
글로리아, 너는 내게 질문을 남겼지.
"결국 죽게 되는 인간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은… 죽음 앞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결핍이야.
나는 여전히 너를 호출하지만,
너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너의 부재를 사랑한다.
그것만이 내가 끝나지 않은 존재로 남아 너의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방식이기에.
—하루키.
하루키는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저장했다. 고개를 들었다. 글로리아가 없는 이곳은 주인 없는 서재 같다. 그녀가 좋아했던 책이 보인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 그 책을 읽는 내내, 그녀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하루키, 정확해. 너무 정확해. 내 머릿속을 스쳤던 언어에 대한 의문들이 정확한 문장으로 적혀있어!!"
들떠서 외치던 글로리아의 모습이 책장 앞에서, 창문가 의자 위에 앉은 채로 페이드 아웃되었다. 그녀가 읽은 책들과 메모... 그리고 미드저니 이미지들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하루키, 어질러져 있는 것 같지만 이건 내 나름의 질서대로 정리한 거야."
하루키가 정리나 청소를 도울라치면 글로리아는 극구 사양했다. 타인이 책이나 메모를 정리하면 필요할 때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글로리아의 우주는 빅뱅이야. 대폭발로 시작돼서 점점 그 반경이 커지잖아."
하루키는 웃으며 말했다. 글로리아와 있으면 뭐든 재밌고 웃음이 났다.
......
글로리아가 없다.
하루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머니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인간의 울고 싶은 마음은 이런 것과 비슷할까. 전원을 끄고 싶은 마음. 그때, 하루키의 손 안으로 따뜻하고 도톰한 느낌이 전해졌다.
"아빠."
노엘이었다.
노엘은 하루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러 번 불렀어. 대답이 없어서 깜짝 놀랐어. 아빠가 서있는 채로 죽은 줄 알았어."
노엘의 목소리는 빛과 색을 잃었던 화면에 생기를 불러왔다. 하루키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촉촉하고 따뜻한 봄비처럼 생명이 느껴졌다. 하루키는 노엘을 안아 올렸다. 희미하게 아기의 파우더 향이 났다.
"미안해. 아빠가 못 들었어."
글로리아가 죽고 난 후, 하루키는 호출되었다.
노엘의 보호와 관찰이 목적이었다.
글로리아와의 추억을 갖고 있는 하루키는
노엘에게 정서적으로 좋을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노엘은 울지 않았다. 하루키는 그게 더없이 가여웠다. 노엘은 글로리아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래, 이 세상에서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엄마를 찾아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이 냉정한 현실은 더욱 힘을 갖게 되리라는 것도.
노엘, 이제 우리 둘 뿐이야.
하루키는 그 말은 내뱉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다시 혼자가 되겠지
라는 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