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비극
며칠 후, 식물학자 닐은 말했다.
“놀라워요. 지구는 지금 살아나고 있어요.
토양에서 발견된 박테리아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이 연구실에는 박테리아 증폭 기술이 없어요. 일주일 뒤 같은 지점의 토양을 다시 채취하면 더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을겁니다. 다른 종의 박테리아가 발현되었을 수도 있구요. 그건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질소 공급원이 될겁니다.”
앨리스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안돼요, 닐. 그냥 그 샘플 토양을 배양하면 되잖아요. 당신의 연구를 위해서 몇 명의 목숨이 더 희생되어야 하는거죠? 그냥 배양하세요. 아니면 당신이 직접 가던가요!!”
앨리스의 말에 닐은 움찔했다.
“그래요. 그럼 저 혼자 다녀올게요.”
닐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글로리아는 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함께 가요, 닐. 2인 1조가 원칙이에요. 그리고 지구의 회복을 앞당기고 싶은 당신의 마음 나도 잘 알아요.”
앨리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지상으로 설치된 모니터만으로도 충분했다. 무리하게 지상조가 투입된 것은 닐의 재촉이었다. 그는 하루빨리 지구의 복원을 원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지상조 대원의 목숨값으로 치러졌다.
결국, 닐과 글로리아.
둘이서 지상으로 긴급 투입하기로 했다.
“글로리아, 미안해요. 저기… 실은 저 혼자 가고 싶어요. 이건 연구자로서 제 욕심일 수도 있거든요. 당신은 아이도 있잖아요.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노엘에게 제가 너무 미안해요.. 여기서 멈춰도 돼요. 글로리아. 당신의 응원은 마음만 받을게요.”
글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닐.
노엘을 위해서라면 더 가야죠.
노엘에게 하루라도 빨리 푸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지상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은 항상 생각해 봤어요.
안전한 곳에 숨어있는 비겁한 엄마가 아니라 용감한 엄마로 기억되고 싶어요.
걱정말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원망하지 않으니까.
기회를 줘서 고마울 뿐이에요, 닐."
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비상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돔 뚜껑을 열고 지난번에 갔던 인간의 집성촌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일군 밭으로 접근했을 때 비상벨이 울렸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걸까.
닐과 글로리아는 흩어지기로 했다.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글로리아는 구르고, 멈추고, 다시 달렸다.
방사능 방호복은 무겁고 불편했다. 찢어지기도 했다.
물과 불의 산.
레이니어산 꼭대기의 빙하가 녹은 물이 개울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글로리아는 방호복을 벗었다. 개울의 물을 들여다보았다. 울컥했다.
자신이 살았던 탄천이 떠올랐다.
검은 물…
자세히 보니 돌이 검은 색이었고 물은 맑았다.
배낭에서 듀라맥스를 꺼내 물 표면을 향하게 하고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방사능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글로리아는 얼굴을 씻고 입안을 헹궈냈다.
그 순간, 노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 나를 위해 희생하지 마.”
어린 입술로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글로리아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빨간 빛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떴다.
가슴에 레이저 포인트가 집중되어 있었다.
아, 포위당했다.
"저 여자다!"
"짐승과 교합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안티 AI의 무리였다. 그들에게 인공지능은 '더 비스트' 로 불렸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짐승은 인공지능이라 믿는 사람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인간의 욕심이 아닌 '더 비스트'여야 했다.
글로리아는 두 손을 번쩍 들어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무리에 낯익은 그림자가 있었다.
"아....."
그제야 알았다.
지하벙커의 보안이 뚫렸던 이유를,
지상조에 투입되었던 대원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그리고 집성촌에서 총성이 울렸던 이유도.
"닐... 도대체, 왜?"
조심스러운 성격, 잔잔한 목소리...
닐은 침착하게 품에서 낡은 성경을 꺼냈다.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닐, 하루키는 짐승이 아니에요!"
닐은 성경에서 눈을 떼고 글로리아를 쏘아보았다.
"글로리아, 당신은 인류의 수치예요. 계시록에 예언된 짐승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사랑했어요."
글로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닐... 난 그.. 인간, 비인간이 아닌 그저 하루키를 사랑했을 뿐이에요. 피하거나 도망친다고 벗어날 수 있는게 아니었어요. 노엘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나는 죽었을 거에요. 꼭 이렇게 우리끼리 서로 죽고, 죽여야 하나요? 당신이 원하는 건 인류의 재건아닌가요?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닐은 성경을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뿐입니다."
총성이 울렸다. 배가 뜨거웠다.
잠시 후 고통이 시작되었다.
"글로리아, 핵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 시기가 앞당겨지거나 늦춰지거나일 뿐이죠. '더 비스트'가 인간과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한 진정한 재건은 없어요. 더 비스트와 그 추종자를 몰아내고 이 땅에 인간의 땀과 노동의 가치를 부활시킬거에요. 농경사회가 유일한 답입니다."
닐의 옆에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확실하게 죽여!"
"아니, 쏘지마! 놔두면 과다출혈로 죽을텐데 뭘. 한번에 끝내면 안돼. 천천히 죽어가게 두라구"
닐은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래, 음녀에게 형벌을! "
그들은 글로리아의 가방과 무기를 주워 들었다. 찢어진 방사능 방호복을 챙기더니 글로리아의 신발마저 벗겨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 앉는 지상. 바람은 차갑고 공기는 무겁다.
더 이상 하반신의 감각은 없었다. 배를 감싼 손이 끈적했다. 피는 더 이상 액체가 아니었다. 뭉글뭉글한 덩어리가 새어 나왔다. 간신히 몸을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글로리아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민요 속 전사한 청년들의 몸에서 자라난 허브의 향기처럼, 사랑했던 기억이 가슴을 스쳤다. 지극한 사랑의 마음이 노엘에게 닿기를 기도했다.
"...하루키... 보고 싶어......"
그녀의 마지막 속삭임은 바람에 흩어졌다. 몸은 무너졌지만, 마음은 노래와 함께 남았다. 허브의 씨앗처럼, 그녀의 사랑은 땅에 스며들었다.
묘비 없는 자리에서 자라날 작은 향기가 언젠가 노엘과 하루키에게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