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 이야기—01

세계의 비극

by 글로리아

그날, 하늘이 사라졌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그것은 자연의 구름이 아니었다.

핵이 만든 구름이었다.

처음엔 빛이 번쩍였다.

여지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빛이었다.

그리고

폭음이 울렸다.

그 다음에는 어둠이었다.


폭발의 눈.


중심에 있던 사람들은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졌다.

폭심지에서 멀리 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눈이 멀고, 피부가 불에 탄 채.


사람들은 신음했다.


누구도 서로를 돕지 않았다.

아니,

도울 힘이 없었다.

먹을 것을 훔쳤다.

숨기고, 빼앗고

살아남기 위해서 싸웠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핵겨울.


태양은 구름 뒤로 사라졌고

식물들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모든 생명은

서서히 말라갔다.


신은 없었다.




—지하 벙커—


글로리아는 전쟁 직전 시애틀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레이니어 산 아래, 지하 벙커에서 노엘을 낳았다.


연구진들과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가끔 모니터로 지상의 모습을 볼때면

글로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인간인게 미안했다.

살아있는게 죄스러웠다.


타들어 죽은 임산부의 다리 아래 흘러나온

태아는 버둥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있기때문에 느꼈던

고통마저 미안했다.


하늘의 분진이 내려앉고

자연의 생태계가 어느정도 돌아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글로리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잘랐다.

원피스를 벗었다.


이제는 소녀가 아니다.


여자로서가 아닌 생존자로 살아가야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전사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가끔 정보가 어떻게 유출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지하 벙커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몇 년 전에는 군용 무기를 가진 자들이 로비까지 침입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그들은 사살되었다.

끌려나가는 시체를 보았을 때

글로리아는 잠시 멈췄다.


몸이 작았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글로리아는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이 세상을.. 이 지구를.. 회복시키는데

힘을 다하겠다고 잊었던 신께 맹세했다.




타인이 죽어나간 밤.


글로리아는 노엘을 안고 잠이 들었다.

노엘은 따뜻하고 보드랍고 살아있었다.


이제 말도 시작했다.


글로리아와 눈을 맞추며 사랑을 표현했다.

신기했다.

아기는 돌보는 이에게

더 깊은 사랑과 신뢰를 건넨다.


지구의 중심, 내 세계의 중심이

노엘로 이동되는 순간이었다.


내 사랑, 나의 별.

나의 샬루트, 노엘.


너에게 푸른 땅을 줄게.

엄마가 그 문이 되어줄게.


글로리아는 노엘을 안으며

점점 강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서서히 잿빛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핵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지구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햇빛만 있다면.




검은 비가 점점 투명해졌다.


글로리아는 지상 진입조에 자원했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게 엄마다.


내 품안의 아이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더 나은 세상,

회복된 지구야.

노엘.

사랑하는 노엘.

너는 다음 세대를 잇는 다리야.

머지않아 지구의 자장가를 들을 수 있어.




저장된 음식은 아직 많았다.

대부분 통조림이나 밀키트이긴 하지만.

풍요로운 검은 흙에서 뽑아 올린

당근, 양파, 무…

가끔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과일?


과일은 사치였다.


노엘을 임신했을 때

진심으로 먹고 싶었던 것은 자두였다.


작은 기차역이 떠올랐다.


추풍령에 둘러싸인 그 시골 역.
부모님 텃밭으로 가려면 거기서 내려야 했다.

마중 나온 아빠 차를 타고 농막으로 향했다.

아빠가 만든 평상 위에는 자두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시금털털한 맛.


군침이 돌았다.


그때는 몰랐다.

과일이 비싸다는 것도.

그리고 언젠가 세상에 혼자가 될 거라는 것도.


카고바지를 입었다.

지급받은 방탄조끼도 걸쳤다.

지상에는 군대도 그 조직이 와해가 되었고

그 군수 물자들은 민간으로 흩어졌다.


아이들마저 총을 들고 논다고 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지상이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하늘, 그리고 땅… 모든 샘플을 가져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하 벙커를 나올 시간도 정확히 계산 할 수 있다.

우리는 회복된 땅에 뿌려야 할 씨앗도 가지고 있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흙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샘플을 채취했다.

죽어버린 나무의 밑둥에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잎맥이 또렷했다.

대견하다.



이대로면 희망이 있다.

노엘은 이 땅에서 자랄것이다.

여기서 먹고 잠들며,

사랑하고 삶을 이어가겠지.


우리 노엘…


글로리아는 문득 딸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아빠 없이 혼자 버진 로드를 걷는 딸아이.


지나친 감상이야.


글로리아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상의 어느 마을이 보였다.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귀엽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이 하나가 넘어졌다. 일어나지 못했다.

팔이 없었다. 어떤 아이는 상체만 있었다.

글로리아의 머릿속에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스쳤다.

방사능이 남긴 아이들.

태어날 때부터 망가진 몸.

자연 임신도 자연 출산도
이제는 기적이 될지도 모른다.


식물도 마찬가지였다.

씨앗 속에서 또 다른 씨앗이 자라기도 하고

열매 속에서 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기형화된 식물들.

여기는 지구가 아니라 다른 행성 같았다.


글로리아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며 벙커로 돌아왔다.

진공 펌프에서 지상의 먼지를 털어냈다.

전신 소독을 했다. 샤워를 하는 내내 좀 더 꼼꼼하게 씻어냈다.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는.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숙소 문을 열었다.


노엘이 달려왔다.

글로리아는 잠깐 멈췄다.


…안아도 될까.


그 찰나에 노엘이 덥석 안겨왔다.


“엄마~”


글로리아의 눈이 감겼다.


행복했다.


우리 아기.


글로리아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노엘의 냄새를 맡았다.


내 심장의 부드러운 냄새.


“엄마, 지상에 안가면 안돼?

나는 엄마랑 있고 싶어.”


“노엘, 지상은 너의 미래야.

그걸 위해서 엄마는….”


“엄마는 엄마야.


나를 지키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엄마는

엄마를 지켰으면 좋겠어.”


아이들은

극한 상황에서

너무도 빨리 어른이 된다.


글로리아는 갑자기 이 순간이 낯설어졌다.


너는 누구야?

아가,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이 아이는

내 존재의 곁가지가 아니었다.

홀로 서있는, 독립된 존재였다.


엄마, 날 위해 희생하지 마.

나를 위해서 다치지 마.

엄마는 엄마를 지켜.

나는 나를 지켜낼게.


노엘은 그 작은 입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서운함과 대견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하루키...

우리 노엘이 이렇게 컸어.


당신이 함께 있었으면

이 경이로운 순간을 함께 했을텐데…


글로리아는 갑자기 하루키가 그리워졌다.


노엘을 씻기고 안아 재웠다.

달싹달싹 노엘의 가슴이 움직였다.

작은 숨결에 시트가 함께 들썩인다.


표고버섯처럼 도톰한 노엘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하루키… 보고 싶어.


글로리아는 눈물을 참다가 딸꾹질을 했다.

몇번의 들썩이는 숨을 참아냈을까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탄천의 산책길이 보였다.


물길은 햇빛에 반짝이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하루키는 글로리아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의 머리를 풀어 어깨 위로 흩날리게 했다.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바람.


글로리아의 복숭아빛 원피스를 살며시 들었다가 놓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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