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의 끝에서 집을 외치다
“우리 주말에 집 보러 갈까?”
도윤이 저녁을 먹다 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혜정은 젓가락을 들고 있다가 잠시 멈칫했다.
“진짜로? 우리 집 살 거야?”
“산다는 게 아니라… 그냥 보자. 보는 건 공짜잖아. 뭐가 있는지는 봐야지.”
혜정은 배달 온 육개장의 파를 집어올리며 말했다.
사실 도윤은 속으로 반쯤 설렜다.
'드디어 우리도 자가 얘기를 시작하는구나.'
하지만 그 설렘은 주말 오전, 부동산에서 한겨울처럼 식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도윤과 혜정은 부동산 문을 밀고 들어갔다.
좁은 공간엔 소형 냉장고 소음과 벽에 붙은 매물 사진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매물 보러 오셨어요?”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공인중개사가 손님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도윤이 어색하게 앉으며 말했다.
“저기… 이 동네에서 집을 좀 알아보려고요.”
“아, 실거주요? 투자요?”
“실거주 생각하고 있어요.”
중개사는 바로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예산은 어떻게 되세요?”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말했다.
“현금으로… 한 5억 정도요.”
중개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아, 세 낀 매물 찾으세요? 아니면 바로 들어가실 거예요?”
“곧 전세계약이 다 되가서 4개월 후에 실거주 할 수 있는 집을 찾고 있어요.”
중개사는 화면을 응시하며 몇 가지 검색을 더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음… 5억으로 들어가긴 좀 어렵긴해요. 빌라는 싫죠?”
“네.. 뭐.”
“대출은 전혀 고려 안 하세요?”
도윤은 눈을 피하며 작게 웃었다.
“사실 그 5억 중에 1억은 회사 복지로 저금리 대출 받을 건데요…
그거도 빚이니까 추가적인 은행 대출은 안 받고 싶어요.”
중개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대출 없이 서울에서 집 사는 건… 글쎄요, 로또 맞거나 부모님 도움 없인 쉽지 않아요.
정말로 대출이 싫으시면, 이 동네에선 현실적으로 선택지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도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정은 말없이 손을 모으고 있었다.
중개사는 모니터를 돌려주며 말했다.
“아, 이 매물은 어때요? 이 동네에서 가장 저렴한 구축이에요.
복도식이고, 18평. 1992년 준공, 역에서 도보 15분 정도 걸려요. 언덕이 좀 있지만요.”
도윤은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사진 속 아파트의 외벽은 군데 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베란다마다 제각각 설치된 방범창과 빛 바랜 에어컨 실외기가 무질서하게 매달려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서울에도 아직 이런 데가 있었나’ 싶은 느낌.
“어……”
“집주인한테 전화해볼게요.”
중개사가 전화기를 들었다.
“아, 사모님~ 오늘 매물 보시겠다는 분이 계신데 지금 집에 계세요?
네, 바로 모시고 갈게요.”
전화를 끊은 중개사가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이렇게 당일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집 보기가 쉽지 않은데 운이 좋으시네요.”
하지만 도윤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오래된 집에서… 거기다 역에서도 꽤 멀잖아.
이런 데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아파트 단지 앞.
단지는 어딘지 모르게 적막하고 음침했다.
각이 닳아 둥글어진 현관 계단을 밟고 덜컹거리며 느리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곳곳에 실금이 간 복도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주인이 문을 열고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 목소리는 묘하게 멀게 들렸다.
현관 바로 옆 작은 방 벽지엔 곰팡이 자국이 있고, 방 문마다 셀프로 페인트칠을 한 흔적이 가득했고,
좁은 부엌에 한낮에도 거실엔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도윤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을 둘러보다가 혜정의 얼굴을 봤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집을 나와 단지 앞에서 걷던 중, 혜정이 조용히 말했다.
“나 이 집 살면서 아기 키울 상상은 안 돼…”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도윤은 소파에 앉아 과일을 깎으며 문득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은 빚지지 말고 살아라. 은행 돈은 결국 남의 돈이다.’
그 말이 어릴 땐 당연하게 들렸는데, 지금은 그 말이 사슬처럼 느껴졌다.
혜정은 조용히 말했다.
“우린 애 낳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지금부터 빚 지는 건 무서워.”
도윤은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TV에서는 부동산 전문가들이 시세 전망을 떠들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지금도, 앞으로도… 타이밍을 못 잡는 거 아닐까?”
도윤의 말에 혜정은 피식 웃었다.
“아냐. 우리는 그냥… 좀 더 신중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