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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 선호하는 업체의 비밀

by 조직실험실

최근 사내에서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실행할 파트너사를 찾기 위해 수십 군데의 업체를 컨택했고, 컨설팅, 콘텐츠 제작, 행사 대행 등 영역별로 전문성이 특화된 회사들을 두루 만났습니다. 글로벌 빅펌부터 국내 1인 영세 업체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다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웠습니다. 이 생태계의 민낯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업체를 만나는 과정은 일종의 면접과도 같았습니다.

대기업이 ‘갑’의 위치에서 그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양쪽 모두가 긴장감 속에 서로의 패를 읽는 과정입니다. 대기업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들의 업력’을 가늠합니다. 반면 파트너사는 이 프로젝트가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하고, 의미 있는 레퍼런스를 쌓을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첫 미팅은 서로의 기대와 한계를 조심스레 확인하는 ‘간보기의 현장’이 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많은 업체들은 이 단순한 문법을 파괴했습니다.
미팅은 ‘함께 일할 수 있을까’를 탐색하는 자리여야 하지만, 상당수는 스스로를 과장하거나, 혹은 고객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엇나간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공식 제안까지도 가지 못하고 영원히 ‘믿거(믿고 거르는)’ 리스트에 들어간 업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도 그들이었지만, 후보를 점점 좁혀야 하는 우리 입장도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네임밸류가 없는 업체일수록, 업체 평판이 바로 대표 개인의 평판으로 직결되는 상황에서 도대체 왜그럴까? 안타깝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기대와 실망의 지난한 서사를 뚫고 "계약하고 싶은 업체"로 남은 이들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네 자신을 알라, 메타인지

입찰 과정을 진행하며 가장 뚜렷하게 느낀 업체 퀄리티의 차이는 메타인지, 즉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에서 기인했습니다. 자신이 어디에 강점이 있고, 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명확히 아는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의 차이는 마주앉은지 10분 안에 판가름 났습니다.


많은 업체들이 “저희는 다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만능의 유혹에 빠져 있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요구한 것은 A인데, “A도 잘하고, B도 자신 있고, C도 가능합니다.”라고 장황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첫째,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잃습니다. ABC도 아니고 콕찝어 A를 물었는데 B와 C의 경험을 나열하면 정작 주인공 A가 묻힙니다. A의 전문성을 검증하고 싶은 우리 눈에는, 탁월한 맛집이 아니라 아무거나 다 파는 푸드코트처럼 보일 뿐입니다.

둘째, 이해력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A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자꾸 B와 C를 말한다면, 이 업체는 우리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대표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겠지요. “이번에 프로젝트를 따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B와 C도 잘한다는 걸 알려두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요. 그러나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두 번째 문제 즉, 이해력 문제로 인해 그 미팅은 그저 ‘한 번뿐인 기회’로 끝나버리고, 우리의 고민을 정확히 이해해줄 수 있는 다른 파트너를 다시 서치할 뿐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명확히 알고, ‘우리의 강점은 여기까지입니다.’를 깔끔하게 말할 수 있는 회사가 진짜 유능해 보였습니다. 유려한 말솜씨, 세련된 레퍼런스보다 중요한 건, 자신을 명확히 알고 이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2. 나만의 쪼, 철학적 신념에 대하여

많은 업체를 만나다 보니, 미팅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첫째, 고객의 입맛에만 맞추는 ‘서비스형 업체’
둘째, 자기만의 색깔로 임하는 ‘정체성형 업체’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착수되면 위 두 가지가 적절히 섞여야 하지만, 놀랍게도 첫 인상에서는 후자가 훨씬 매력적입니다. 왜냐하면 고객사(=대기업) 입장에서는 그들의 철학이 곧 일에 대한 진정성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은 “당신의 전문성과 시간을 돈으로 사기”위해 이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기에, 진심이 묻어나는 철학을 볼 때 진짜 전문가를 만났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업체의 직원이 아닌 대표가 직접 미팅에 참여하는 경우, 그 만남은 더욱 특별했고 적나라했습니다. 한 번의 미팅 만으로도 “오..이 일에 자신을 온전히 투영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인상이 남았고, 그들의 제안서에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철학의 향기가 배어 있었습니다. 무색무취 제안서가 아닌, 한 장 한 장이 “나 ○○입니다.”라고 외치는 제안서. 누군가에게는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그런 제안서는 내부 보고를 하기도 훨씬 수월했습니다. 그 안에는 방향성과 진심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고객의 모든 입맛을 맞출 수 있다고 하는 '서비스형 업체'는 모든 영역에서의 깊이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으로 정체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저렴한 누군가로부터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리스크도 함께 존재했지요.


3. 태도가 곧 품격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미팅에 참여한 그들의 비언어적 표현 즉, 태도였습니다. 사람은 말보다 몸으로 더 많은 신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 신호는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상대의 인상을 결정합니다.


누군가는 첫 미팅에서 의자에 기대어 턱을 들어올리고, 온몸으로 “나는 잘난 사람입니다.”를 표현했습니다. 우스웠습니다. 또 어떤 대표는 초면의 공식석상에서 “X나” 같은 속어를 사용하거나,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어쩌면 ‘힙함’이나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미팅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눈이 동시에 찌푸려졌습니다. 존중이나 힙함이 와닿기도 전에 무례함이 먼저 엄습했고, 이로 인해 그들이 이야기하는 어떤 화려한 실적이나 경험들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계약이 성사되면 결국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이 숨쉬듯 오갈텐데, 건방지고 무례한 사람들과는 그 과정이 힘들겠다는 예측이 모든 것을 압도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발주 과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생태계의 민낯을 본 흥미로운 현장이었고, 동시에 ‘신뢰’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대기업이 반복적으로 선호하는 업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을 명확히 아는 회사, 철학이 분명한 회사, 태도가 안정적인 회사


이 세 가지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신뢰의 공식일 것입니다. 모든 기반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요. AI가 제안서를 쓰고, 알고리즘이 입찰을 돕는 시대라 해도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이들과 함께 일하고 싶은가?’라는 감정의 한 줄기 판단이 모든 걸 결정합니다.


비즈니스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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