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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실리테이터는 MC가 아니다

조직개발을 '포스트잇 지옥'으로 만든 건 누구인가

by 조직실험실

“조직개발 하면 워크숍, 워크숍 하면 퍼실리테이션.”


이 단순한 등식이 늘 불편했습니다. 더 난감한 건, 이런 이야기가 조직개발을 잘 모르는 분들이 아니라, 정작 HR을 업으로 하는 동료들 입에서 불쑥불쑥 나온다는 점이었습니다. 퍼실리테이터를 마치 이벤트 사회자쯤으로 격하시키는 장면을 몇 번이고 보았고, 그때마다 ‘아, 조직개발이 이렇게 가볍게 소비되고 있구나’ 하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퍼실리테이터 라는 역할은 기업 현장에서 아직도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오해 1. 퍼실리테이터는 MC다


저는 회사에서 사내 퍼실리테이터 1호였습니다. 자격을 따고, 사내에서 다양한 워크숍을 설계하며 현장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강사 제도와 연결해 ‘퍼실리테이터 활동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거 솔직히 MC 아니에요? 행사 진행하는 건데 강사료 지급은 말이 안 되죠. 그러면 개나 소나 다 강사료 받겠네요.”


솔직히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MC’라니요. 퍼실리테이터는 단순히 마이크 잡고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묻히지 않는 의견을 끌어내고, 감춰진 갈등을 안전하게 조율하며, 집단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걸 단순히 “행사 진행”이라고 부른다면, 엔지니어도 그냥 “도면 그리는 사람”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일까요?


오해 2. 퍼실리테이션은 교육이다


워크숍에 들어가면 많은 분들이 저를 ‘강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워크숍을 일종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인식하고, 퍼실리테이터에게 무언가를 ‘배워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여자들의 태도도 종종 수동적입니다. “이 워크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만 품고 들어오는 것이지요.


하지만 퍼실리테이션은 교육이 아닙니다. 교육은 정답이 있는 ‘닫힌 결말’이라면, 퍼실리테이션은 정답은 정해져있지 않고 우리끼리의 해답을 만들어가는 ‘열린 결말’입니다. 퍼실리테이터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집단이 답을 찾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판을 짜는 역할을 합니다. 참가자 스스로 논의하고 합의하며, 마침내 자신들의 답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것이 퍼실리테이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강사님”이 답을 내려주길 기대하곤 합니다.


오해 3. 퍼실리테이션은 포스트잇 지옥이다


워크숍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구가 무엇일까요? 바로 포스트잇입니다. 그래서 현장에는 소위 ‘포스트잇 공포증’에 시달리는 참가자들이 많습니다. 왜일까요? 포스트잇 붙이고 떼고 분류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거쳤지만, 정작 그 결과로 아무 변화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퍼실리테이션 = 포스트잇 파티라는 냉소가 남은 것이겠지요.


물론 저도 포스트잇을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논의 과정의 ‘가시화’를 위한 툴일 뿐입니다. 포스트잇이 없으면 화이트보드, 벽, 온라인 협업툴, 요즘은 AI 기반 보드까지 활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종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기술입니다. 포스트잇에만 매몰되어 ‘노잼 워크숍’을 양산하는 것은 퍼실리테이션의 실패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퍼실리테이션, 나부터 다시 점검하다


퍼실리테이터는 MC가 아닙니다. 교육자도 아닙니다. 포스트잇 장인도 아닙니다.
퍼실리테이터는 집단이 자기 목소리를 발견하고, 서로의 생각을 조율하며,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판을 설계하고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퍼실리테이션이 무조건 옳다는 뜻도, 다른 사람들이 오해했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오해를 마주할 때마다, 부터 퍼실리테이터이자 조직개발자로서 스스로 더 진정성 있게 고민하고, 준비하고, 개입을 설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퍼실리테이션은 단순히 도구나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집단의 마음을 다루는 일입니다. 그 과정을 신중하게 설계하고 책임감 있게 이끌어가는 일은, 결코 일반적인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비난함으로써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매번 워크숍과 조직 현장에서 배우며, 더 나은 방식으로 설계하고, 더 섬세하게 촉진할 방법을 연구해야 하겠지요. 조직개발을 '행사 사회자'나 ‘포스트잇 파티’로 만든 것은 그들의 오해 때문이 아니라, 제가 아직 충분히 진정성 있게 설계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더 진정성 있게, 더 책임감 있게 판을 설계하고 촉진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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