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직은 살고, 다른 한 조직은 무너졌다
조직이 흔들리는 순간, 그 무게를 버티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략일까요, 시스템일까요, 아니면 냉정한 성과 지표일까요.
조직개발 현장에서 목격한 수많은 장면들은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조직의 성패가 갈리곤 했습니다. 임원 한 사람의 태도, 그 태도 속에 담긴 진심의 결이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놀라울 만큼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조건, 같은 위기 앞에 섰던 두 명의 임원.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한 조직은 살아났고, 다른 조직은 붕괴되었습니다.
A 임원은 영업사업부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태초부터 '불리한 게임'이었습니다. 설 자리를 잃어가는 오프라인 영업 채널들만 모여 있어, 성장은 고사하고 방어조차 버거웠습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는 프랜차이즈 법적 분쟁이라는 골칫거리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조직 내부의 공기도 무겁기만 했습니다. 구성원들은 여전히 90년대 영업 전성기의 향수를 품고 있었습니다. 땀과 끈기로 버티던 시절의 방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지금 세대가 말하는 ‘힙’하고 ‘영한’ 조직문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업 부진은 오른쪽 다리에, 법적 리스크는 왼쪽 다리에 젖은 모래 주머니처럼 매달려 있었습니다. A 임원은 그 무게를 지고 낭떠러지를 향해 걷는 형국이었습니다. 사장단 회의에서는 매번 날카로운 질책과 압박이 쏟아졌습니다. “이대로라면 A임원은 재계약도 쉽지 않겠다”는 말들이 곳곳에서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A 임원이 우리 팀을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위기에 몰린 임원들이 흔히 취하는 ‘살려달라’는 형식적인 제스처이거나, 실패를 외면하기 위한 변명 일색의 자리가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꺼낸 이야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업이나 법적 문제는 어떻게든 풀어가면 됩니다. 하지만 제 사람들, 현장에서 뛰는 직원들이 너무 지쳐 있어요. 그들이 무기력해져 가는 모습에서 가장 큰 위기를 느낍니다.
잘 해보겠다는 의지를 다잡는 구성원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온 힘을 다해 일으켜주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순간, 저희는 당황했습니다. A 임원은 구성원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아직 성장할 수 있다. 끝난 게 아니다. 여러분이 이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다시 찾길 바란다.”
그의 언어는 뜨거웠고, 놀라울 만큼 다정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도 바로 A임원의 손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팀에도 우선 순위가 있었고, 자원의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A 임원이 맡은 조직은 누가 보아도 갑갑했습니다. 구조적 한계, 법적 문제, 시대와 어긋난 문화까지. 차갑게 말하자면 ‘팔릴 만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정중히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A 임원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시 회의를 요청하고, 또 다시 찾아왔습니다. 마치 불도저처럼 들이닥쳤습니다. 오히려 때릴수록 전투력이 올라가는 영웅전의 몬스터 처럼, 위기를 맞을수록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오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지난한 회유와 설득의 과정에서 저희는 중요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요함은 단순히 자신의 연임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쇼맨십이 아니었습니다. 지쳐 쓰러져가는 직원들을 어떻게든 부축해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저희는 늘 ‘진정성’이라는 단어 앞에서 흔들립니다. 리더의 말과 행동에 그것이 담겨 있는가, 없는가. 그 한 끗 차이가 조직을 완전히 다른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A 임원의 눈에서 '그 단어'가 읽힌 순간, 저희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고 싶어하는 조직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도와야 한단 말인가.”
사명감마저 뜨겁게 올라왔습니다. 결국 다른 일정과 우선순위를 조정해 A 임원의 사업부를 최우선 아젠다에 올렸습니다.
그 후로 인터뷰를 통해 구성원들의 정서를 세밀히 읽어내고, 어떤 개입이 의미 있을지 구상했습니다. 예상보다 구성원들의 무기력은 깊었습니다. “이런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회의적인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A 임원이 왜 이토록 절실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워크숍 내용은 동기부여를 위해 관계성·자율성·유능성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Deci & Ryan, 1985)에 근거했습니다. 사업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동기부여의 자산들을 충실히 모아 현재 구성원 정서에 이식하는 과정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활동 하나 하나에 ‘함께 연결되고 있다’는 감각을 깨우고, 작은 성공 경험들을 복기하며 조직 효능감이 재건되도록 설계했습니다.
드디어 워크숍 당일, 처음에는 가볍게 분위기를 여는 활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성원들의 진짜 고민이 하나 둘 테이블 위에 올라왔습니다. 긴장된 공기가 대화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은 A 임원의 순서였습니다. 그는 한 시간 넘게 힘있게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사업과 조직에 대한 솔직한 고민, 우리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가능성, 그리고 끝까지 쟁취하겠다는 신규 사업의 청사진까지. 무엇보다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끝까지 함께하고 싶습니다.
머리가 깨지도록 사장실 문을 두드려서
새로운 도전할 수 있도록 할게요.
그의 목소리에는 강하고 진한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외부자인 저희에게조차 그 진심이 생생하게 전해졌습니다. 모두가 고요히 집중하며 리더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날의 주인공이자 꽃은 단연 A 임원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공들여 만든 조직개발 워크숍이 조연으로 밀려나는 순간이기도 했으나, 이는 오히려 크나큰 영광이었고, "됐다!" 안도했습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사업은 수익성을 점차 회복해갔습니다. 조직의 몰입도는 15% 포인트 이상 상승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신호였습니다. 몇 달이 지난 조사에서도 구성원들은 “그 날 위기 속에서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가고자 하는 우리만의 비전에 동참하고 싶습니다."라며 당시의 뜨거움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A 임원은 연말 재계약에 성공했습니다.
조직은 결국 리더의 진정성을 먹고 자랍니다. 화려한 정치적 처세술 만으로는 절벽 끝으로 내몰린 조직을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A 임원은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임원이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위기 앞에 섰던 또 다른 임원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조직은 무너져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