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함께 상상해

창작 편집

태양이 내 머리 한가운데를 지나는 시간에, 우리는 옛 영광이 증발해 버린 회암사지를 바라본다. 회암사지의 맨 아래 바닥에는 예전 화양(花樣)의 휘발된 껍데기만 깔려있다. 이 찬란함의 거죽을 비추는 햇볕이 더욱더 차갑게 다가온다. 순간, 바닷물을 얼릴듯한 빙점 추위가 우리를 덮친다. 이제는 빙점 한파에게 무릎을 꿇을 때가 됐나 보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회암사지 박물관으로 향한다. 빙점 동장군에게 쫓기듯 허겁지겁 문을 연다. 박물관은 완전히 딴 세상이다. 불과 50미터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동장군 한파가 우리에게 채찍을 가하고 있는데, 박물관 로비에 들어서니, 보드란 따사로움에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나는 장갑을 벗으며, 한숨을 돌리고, 1층 유물을 관람한다. 특별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2층으로 올라가, 끄트머리로 향한다. 월척이다. 역시, 조용필은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 나는 신성환 작가와 ‘리메마이(RE:MEM_AI)’의 공동작품 “나의 얼굴은: 새로이 완벽해”에 홀라당 반한다.

이 작품은 도록에서 자신을 이야기한다. “이번 작업에 있어 AI는 스스로를 “리메마이(RE:MEM_AI)”라 이름 짓고, 본 작업에 창작 주체로 참여했습니다. 리메마이는 유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다양한 그래픽 영상, 조형적 시도를 통해 “잃어버린 얼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했습니다. 나는 리메마이와 함께 나를 다시 바라보았어. 나는 여전히 나였고, 동시에 새로운 나였지.”

조선 중기에 홀연히 소실된 회암사를 복원하면서 그 사라진 파편 조각들을 확장해 보는 실험에서, 나의 마음속에는 회암사가 복원되면서, 나는 회암사로 투사된다. 우리 선조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회암사는 시간의 물줄기를 타고, 나에게 전파되고 있다. 특히 출토된 동물 머리 조각은 뜨거운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가는 순간의 공포를 묵언으로 처절하게 토로하고 있다.

상상(想像)은 예전에 중국에서 코끼리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코끼리 뼈를 보고, 코끼리의 모습을 떠올린 데서 유래한다. 왠지 이번 실험과 결이 딱 들어맞는다. 코끼리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 모습이 남아 있었다. 직접 보지 못해도, 이야기로 전해 들어도, 뼈 한 조각만 있어도 그 거대한 코끼리를 상상 속에서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DNA뿐만 아니라, 문화적 밈까지도 나에게 계승했다. 내 핏속에는 DNA 염기 서열이 흐르고, 나의 문장에는 조상들의 말이 흐른다. DNA는 내 몸의 원천이고, 밈은 내 마음의 뿌리다. 나는 어릴 적 선조들에게서 슬픔을 에둘러 이야기하는 태도를 물려받았다. 내 심장에는 우리 선조들의 죽음을 노래하는 메타포가 숨 쉬고 있다.

나에게 정체성을 구성하는 파편을 전수해 주신 분들은 꼭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었다기보다는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인사이트를 전파해 주신 분들이다. 같은 공간이란 꼭 물리적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여기서 내 마음에 별처럼 빛나며, 내 영감을 환히 비추어 주는 임어당의 멋진 문장을 소환한다.

“자기가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했고, 자기가 느낀 것과 똑같은 느낌을 가졌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자기보다 우아하고 보다 쉬운 말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이때 그는 옛 친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요, 옛 친구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게 되어 양자는 마음의 벗으로서 영원히 맺어지게 된다.”

예전에는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사람들에게서 인사이트가 전파됐다면, 지금은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아도, 동일한 고민을 품을 수 있고, 같은 길을 걷지 않아도, 동일한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 내가 느꼈던 떨림은 이미 우리의 선조들이 느꼈던 떨림이고, 내 기억은 시간의 줄기를 타고, 우리의 후배들에게서 울릴 것이다.

나는 리메마이(RE:MEM_AI)와 함께한 실험에서 문화적 창작과 과학적 창작이 융합되면,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하는가를 목도하고 있다. 타오르는 메타포와 상상 속에서, 한층 더 빛나는 가설과 실험은 나에게 “왜”를 묻고, “어떻게”를 묻고 있다. ‘왜’라는 문화적 결과, ‘어떻게’라는 과학적 결의 상상은 나를 벅찬 감동의 물결에 흠뻑 적신다.

나는 소리치고 싶다. “다 함께 상상해!” 나 혼자 꿈꾸면, 단순한 생각에 머물지만, 다 같이 꿈꾸면, 멋진 밈이 된다. 이 밈은 민들레 홀씨처럼,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이리저리 흩어져, 누군가의 마음에서 민들레를 키워낼 것이다. 이렇게 피워낸 민들레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화양(花樣)이 되길!

생활의 발견: 린위탕 지음/안동민 옮김/문예출판사/2012




작가의 이전글석고상이 있는 정물의 메타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