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린 슬픔으로 소통하기

가면

노인 거지꼴의 오디세우스는 에우마이오스를 방문하여 타향에서 온 나그네 행세 연기를 하며 대화를 시도한다. 에우마이오스는 거지꼴의 노인에게 오디세우스는 이타케의 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낙담하며, 포도주나 맘껏 마시고 권한다. 에우마이오스를 잘 아는 오디세우스는 그가 고향과 부모님 곁을 떠나 어린 나이에 이타케로 온 사정을 물으니, 에우마이오스가 대답한다.

“우리 두 사람은 오두막 안에서 먹고 마시고/서로 상대방의 쓰라린 슬픔을 일깨우며 즐길 것이오./진실로 많은 고생을 하며 많이 떠돌아다닌 사람에게는/고통조차도 나중에는 즐거운 법이니까요.”

이후, 그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오디세우스의 아버지 ‘라에르테스’가 그의 몸값을 지불해서 이타케에서 돼지를 치게 된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오디세우스는 그의 사연에 공감한다.

한편, 오디세우스는 노인 거지꼴로 자신의 궁을 방문하여 페넬로페를 만나서 자신이 많은 고통을 겪은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에 페넬로페는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다. “오직 오디세우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내 마음은 소진되어가고 있어요.”

오디세우스는 에우마이오스나 페넬로페를 만나서 쓰라린 슬픔을 일깨우며, 서로 소통하고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공자가 이야기했던 ‘기소불욕 물시어언’이 생각난다.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마땅히 다른 사람도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슬픔을 통해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초딩 때 읽었던 여우와 학 이솝 우화를 들여다보면, 여우는 학을 식사에 초대해서 넓은 접시에 음식을 대접하여 학은 그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다. 며칠 후에, 학도 여우를 초대해 목이 긴 병에 음식을 대접하니 이번에는 여우가 병에 담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다.

이렇듯,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각자가 살아온 삶의 궤적, 자신의 유전적 기질이나 그가 교육받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하지만, 무언가를 싫어하는 것은 감정적이어서 대개 비슷하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배려하는 것은 각자 취향에 따라서 달라지므로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싫어하지는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않으면 된다. 즉, 적극적인 배려보다는 소극적인 배려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아는 것이 먼저다. 누구든 직관적으로 호불호는 구분할 수 있다. 다만, 누군가 자신에게 던지는 ‘그것을 왜 좋아하세요’ 또는 ‘그것을 왜 싫어하세요’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야만 가능하다.

자신의 호불호는 결국 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며, 개인의 호불호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사회는 통일 신라(676년) 이후에 너무 집약된 사회여서, 무언가 훌륭한 호불호가 존재하고, 그 호불호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인들의 호불호마저도 본받으려고 애쓴다. 즉, 위인들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다. 어떤 욕망이 위인들의 욕망인지 자신의 욕망인지를 아는 것은 그것을 실행해 보면 된다. 실행해서 재미있으면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고, 재미없으면 위인들의 욕망일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알기 위해서는 전신 거울 앞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서서 자신을 직시해야만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몸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그렇지만 계속 직시하면 자신을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소통의 출발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오디세이아:호메로스 지음/천병희 옮김/도서출판숲/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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