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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하지만 명성을 얻은 삶

민낯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그리스 문화의 원천이자, 그리스 정신의 출발점이라 불리고 있어서, 2009년 트로이 영화를 본 후에, 천병희 교수의 원전 번역본 일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일리아스가 읽기 힘든 이유는, 스토리를 주로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서 풀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등장인물을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한다. 예를 들면, 일리아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킬레우스’는 펠레우스의 아들, 테티스의 아들, 아이아코스의 손자 등으로 지칭되고, ‘아가멤논’은 인간들의 왕, 아트레우스의 아들, 통치자 등으로 일컬어진다.

일리아스를 처음에 읽으면, 아득한 바위산처럼 등반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주요 등장인물을 파악하고, 그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면, 천병희 교수가 강조하는 ‘인간적인 삶 본질’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결국 일리아스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전반부에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아가멤논을 향하지만, 후반부에는 자신의 절친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향한다.

아킬레우스는 오래 살되 명성 없는 삶과 단명하지만 명성을 얻은 삶 가운데, 단명하지만 명성을 얻은 삶을 선택한다. 나는 이 질문을 아내에게 해본다. 아내는 주저하지 않고, 오래 살되 명성 없는 삶을 선택한다. 나는 계속 바뀐다. 나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전리품 ‘크뤼세이스’를 돌려주는 대신 아킬레우스의 전리품 ‘브리세이스’를 데려가니, 아킬레우스가 완전히 삐져서 이제부터는 나 없이 잘 싸워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트로이아의 명장 ‘헥토르’에게 숱한 남자들이 죽어 나가고 나서야 아킬레우스를 아쉬워할 거라고 퍼붓고 있다.

영화 트로이를 보면, 아킬레우스는 그야말로 마동석처럼 무적의 용사지만, 아가멤논이 자신의 선물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가자, 바로 어머니에게 바로 꼰지르고 있다. 초딩 1학년 교실에서 반장이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을 갈구니, 그 학생이 엄마에게 이르고, 그 학부모는 교장인 제우스에게 직보 하는 형국이다.

괴로운 제우스는 귀찮은 듯 테티스를 돌려보낸다. 천하의 제우스도 조강지처 헤라에게는 꼼짝 못 하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랑 너무 닮아있다. 일단 공부 제일 잘하는 엄마의 민원을 들었지만, 교장 싸모님이 반장 편이라서, 싸모님의 눈치를 보면서 학부모를 돌려보내고 있다.

눈치 빠른 헤라가 제우스와 테티스가 밀담을 나누는 것을 지켜보고 제우스를 갈구기 시작한다. 이에 제우스는 헤라에게 경고한다. 옆에 있던 아들 헤파이스토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머니 헤라를 말린다.

영화 ‘넘버 3’의 깡패 보스가 부인에게 경고하고, 그 옆에서 숨죽이고 듣고 있는 어린 아들이 엄마를 말리는 장면 같다. 재미있는 점은 2,800여 년 전 그리스에서도 현재의 우리나라처럼 아버지들이 어머니들에게 바가지 긁히다가, 아버지들이 한번 성깔을 부리면 어머니들이 깨갱하는 것이다.

다시, 질문한다. 오래 살되 명성 없는 삶과 단명하지만 명성을 얻은 삶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킬레우스는 단명하지만 명성을 얻은 삶을 선택했지만, 명성을 얻는 방법이 맘에 들지는 않는다.

트로이아와의 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 중 크뤼세이스는 아가멤논에게 분배되고,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에게 분배되지만, 사제의 딸 크뤼세이스를 돌려주는 문제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말싸움을 하면서 문제가 꼬인다.

일리아스의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로 보면, 아가멤논은 ‘인간들의 왕’이나 ‘통치자’로 묘사되는 것으로 봐서, 최고의 권력자로 보이며, 아킬레우스는 ‘준족’으로 통칭되고 있어, 최고의 맹장으로 보인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갈등으로 대찬 인물들의 기싸움을 시작한다. 넘버 1이 넘버 2를 길들이는 방식은 공개적으로 서열을 통해서 분배된 전리품을 빼앗는 것이다. 이에 아킬레우스가 칼을 빼어 들려고 할 즈음에, 아테나가 아킬레우스에게만 보이도록 나타나, 만류한다. 아킬레우스도 아테나의 말에는 복종하기로 약속하며, 아가멤논과의 다툼을 박차고 나온다.

이후가 재밌다. 삐진 아킬레우스가 어머니에게 기도를 통해서 꼰지르는 것이다. 능력이 뛰어난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기도를 듣자마자 순간 공간 이동을 통해서 아들 옆으로 온다. 아들 아킬레우스의 민원을 듣고,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그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용을 쓰지만, 아가멤논의 인맥도 만만찮다.

나는 자신의 명성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성을 다른 사람과 경쟁을 통해서 지키려 하는 점이 맘에 들지 않는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여명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너무 초조하다. 마치 다른 모든 것을 잃더라도 명예만 지키면 된다는 심정인가? 그렇게 지켜진 명예는 너무 초라해 보인다.

일리아스:호메로스 지음/천병희 옮김/도서출판숲/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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