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이 오래 걸리는 사람입니다

보편의 속도보다 느린 삶

by 윤슬

1월의 절반이 지나갔다. 그동안 다이어리와 일기장에 기록을 남기면서 내 상태를 돌아보고 내가 처한 상황을 짚어왔다. 설레고 즐거운 날도 있었고 불안하고 우울한 날도 있었다.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도 서로 다른 다채로운 나날들이 다닥다닥 모여 앉아 있었다.


나를 돌이켜보면 나는 참 겁이 많고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학에 가는 것도,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무서웠고, 영화나 연극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모두 무서웠다. 하고 싶은 것은 여러 가지 있었는데 망설이고 주저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썼다. 부팅이 되기까지 로딩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었고,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면 웅크렸다가 남들이 한참 간 뒤에야 뒤늦은 출발을 했다. 겁을 집어먹고 뒤처지는 내 모습이 싫어서 서두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빠릿빠릿하고 똑똑하게 야무진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용기를 내는 거지 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이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알게 된 건 내가 나를 단 한 번도 믿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불안과 우울의 근저에는 불신이 있다는 것. 아주 뿌리 깊은 불신. 내가 나를 믿는 것도 아니지만 못 믿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상태에라도 머물렀다면 뭔가 달랐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남들한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나한텐 큰 맘을 먹어야 하는 일들이었으니까.


이후로 나를 믿어보려는 시도를 해봤다. 해외로 워홀을 떠나본다든가 서울로 올라와서 일을 찾아본다든가 공연을 만든다든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든가. 매번 모두 느리게 시작되었고 오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 속도였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는 데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것들의 성과는 사회가 원하고 예측하는 만큼이 아니었다. 남들이 1년 안에 할 것들을 몇 년에 걸쳐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태운 것도 아니었고 미련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뛰어들지도 포기하지도 못한 채로 바들바들 떨면서 느릿느릿 이어갔다. 일도, 사랑도, 이별조차도. 그 결과 나는 어영부영하고 부연 게 안개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흑도 백도 아닌 경계가 흐릿한 사람. 작은 눈덩이만 모을 뿐이지 눈사람을 만들진 못하는 사람. 지금처럼 글을 공개하는 것만 해도 마음먹기까지 몇 년이 걸렸나 보면 여전히 나는 나다.


그러나 그게 같은 자리에 머무른 채로 변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때는 글을 공개적으로 쓰지 못했으나 지금은 공개적으로 쓰고 있는 것처럼 보편의 속도보다 느리지만 조금씩의 변화가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앞둔 지금이 이토록 힘겨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어떤 작은 변화를 불러오리라는 짐작도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은 나를 조금 알고 나의 불신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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