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일까

휴식을 잊은 사람

by 윤슬

밤 9시 8분. 퇴근하고 뭘 했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가 있다. 지금 내 앞엔 다이어리들이 쌓여 있다. 일상을 적는 일기, 시간별 한 일을 기록하는 버티컬 위클리, 쓸 글감과 업로드 완료한 글을 기록하는 위클리, 일정과 투두 리스트를 체크하는 기본 다이어리, 감정일기, 독서일기, 하루를 다섯 줄로 요약하는 5년 일기.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를 꾸미는 일은 내 취미 중 하나다. 피곤하고 지친 하루 중에 (주로 하루 끝에) 귀여운 스티커와 감성적인 메모지를 붙이며 색색의 펜으로 뭔가를 끄적이다 보면 내 위로 텁텁하게 쌓였던 먼지 같은 것들이 털어진다.


그러나 어젯밤에는 그런 기분을 느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후까진 멀쩡했던 몸에 무리가 왔고 두통과 요통이 생겼다. PMS(생리전증후군)에 피로까지 크게 덮친 것이다. 이렇게 아파야지만 꼭 최근의 행태를 돌아보는 나란 인간은 어리석다. 새해가 됐다고 들떠서는 하루도 쉬질 않고 달렸다. 불면증으로 잠도 못 자면서 편안한 휴식시간까지 챙기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만났던 애인은 내게 제발 좀 쉬라고, 가만히 좀 있으라고 자주 말하곤 했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은 순간이 오면 그때서야 후회하며 건강한 루틴을 다짐했다. (다음 주부터 헬스장에 가고 말겠다.) 멈출 줄 모르고 신나서 달리다가 고통을 자초하는 습관의 반복. 그걸 올해는 좀 끊어내려고 한다. 파리에 머물 때는 카페 테이블에 앉으면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를 구경하며 음료를 마셨고, 햇빛을 즐기든 떨어지는 비를 감상하든 날씨를 즐기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카페에서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투두 리스트부터 챙기고 펼친다. 그리고 책이든 노트북이든 오직 할 일에만 뚫어지게 눈을 고정시킨다. 스트레스가 오르면 다디단 케이크를 먹으면서. 사실 이건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이 아닌데. 나는 느긋하고 느슨하게 살고 싶고, 쉼에 죄책감을 갖기보단 행복하고 싶은데. 휴식이 뭔지 잊은 사람 같다. 소설가 김연수는 『지지 않는다는 말』 에서 휴식을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


그의 말대로 내가 사는 세계가 그렇게 바쁘고 넓어야 할까, 그렇게 많은 걸 알아야 할까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 왜 그렇게 늘 내 마음은 조급하고 할 일이 줄어들지 않는 건지. 잠도 자지 못 할 만큼 불안하게. 잘 쉬지 못하니 나의 안쪽으로 고이고, 그럴수록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다시 나한테만 잠기는 순환이란 걸, 결국 내 욕심과 집착을 내려놔야 하는 일이란 걸 깨닫는다.


일기나 다이어리가 아무리 좋아도 더 이상 그게 취미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순간, 가쁜 순간, 즉시 멈추고 고개를 들자. 세계를 경험해야 하는 순간이다. 아무것도 읽지 않고 쓰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자. 한여름에 즐겨했었던 명상을 다시 하는 것도 좋겠고, 조용히 차를 한 잔 마시는 것도 좋겠다. 반경 10미터 내의 세계 속에 가만히 날 놓아두자. 가만히. 조용히. 그렇게 잘 쉬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물건들과 내 일을 다시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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